숨, 나비, 여신
「SD 프시케」는 그리스어 '프시케(Ψυχή)'의 여러 상징적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자소의 흐름을 이어주는 연결 획을 통해 글자가 하늘하늘 살아 숨쉬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또한 절제되고 곧은 인상의 Upright와 화려한 인상의 Italic이 하나의 패밀리로 설계해 두가지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죠. 그럼 「SD 프시케」의 탄생기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라틴 문자와 유기적인 이음획
「SD 프시케」는 2024년도 초에 실시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제작자들의 직접 의견을 듣고, 필요한 역할군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된 폰트입니다. 리서치에서 신규 폰트 출시에 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 적극적인 영상/광고 및 그래픽 분야의 창작자 분들의 선호와 필요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창작자 분들은 섞어짜기 없이 한글과 라틴이 잘 어울리는 글꼴을 선호했으며,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해주셨습니다.
같은 시기에 실시한 ‘외부환경 사용자 실태 조사’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경향을 찾을 수 있었는데요. 바로 심플한 인상의 고딕계열 글꼴과 대비되는 장식적인 이음획을 이용한 독특한 레터링이 영상/마케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것이죠. 이국적이고 우아한 표현 의도에서 더 나아가 한글 없이 라틴 문자로만 표지나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도 이전에 비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타이틀 레터링, 영문 폰트와 비교할 만한 폰트들을 수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는데요. 다양한 파운드리들이 저마다 유기적인 이음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는 폰트를 시장에 판매하고 있었지만 산돌 브랜드에 이런 스타일의 글꼴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산돌의 라이브러리를 강화하고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해 신규 기획의 제작 우선 순위가 높아졌습니다.
균형 잡힌 개성
추가 리서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시장에서 사랑받는 디자인의 특징에 한가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균형 잡힌 개성”, 디자인 잠언 같은 문구네요. 실험적인 구조와 독창적인 디테일은 한시적으로 트렌디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금방 그 유행이 식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죠. 따라서 새로운 폰트는 시선을 확 끄는 포인트를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절제된 개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조건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특색이 사용자 요구인 ‘라틴 페어링 유연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기적인 타이틀의 역할 만이 강조되어 화려한 표현만 차용한 디자인이 아닌, 익숙한 라틴 스크립트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형태, 더 나아가 영문 알파벳만으로도 사용 가능한 폰트로 기획을 발전시켰습니다. 자연스럽게 라틴 폰트에선 익숙한 개념인 이탤릭 스타일 확장으로 아이디어가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트렌디하면서도 보다 장기적인 생명력의 폰트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방향성 정리: 상반된 개념의 조화
1차 스케치 (24.05)
부끄럽지만 초기 스케치는 이렇습니다. 정기적인 공유 회의에서 이 시안은 기획에서 어필한 소구 포인트와 상이하여 ‘다양한 표현 가능성’이 제한되었고, ‘시장에서 선호하는 디자인’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언급되었죠. 저는 기획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구현하고자 할 표현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 분명한 라틴 스타일 특성 (Upright-Italic의 차이 적극 반영, 강한 획 대비)
- 정제되고 안정된 표현 (표현 정리: 포인트 디자인 제한)
- 패밀리 확장 (장기적으로 여러 영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이를 통해 이 폰트에 대한 디자인 방향성이 다시 한번 정리되었습니다.
- 전통적인 구성에 현대적인 감성을 더한다. - 가독성, 시각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세련된 감각을 갖춘다.
- 직선과 곡선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이음획이 독창적인 리듬감을 부여하여 고유의 심미성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렇게 두가지 대비되는 개념의 절묘한 만남이 일종의 큰 방향성, 그림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름이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이 시점에 이미 이 폰트엔 일종의 캐릭터가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두 얼굴의 폰트’ 였죠.
1878, 「Eros and Psyche」, NYPL Digital Collections
둘, 하나
“이 이음획은 부동의 자체를 돌보는 한 숨, 곧 지덕의 발현이다.”
이게 무슨 덕이 넘치는 문구일까 싶지만, 소크라테스의 육체-영혼 이원론을 살짝 변형해봤습니다. 이 문장은 떨어진 획 사이를 이어주는 유기적인 획을 더 자연스럽게, 더 아름답게 보이게 제작하기 위해 주문처럼 읊는 것이었습니다. 폰트 제작은 때때로 수행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이 폰트가 다다르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며 특별한 문구를 외우게 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유기적인 이음획은 이 서체를 특별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주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Upright(곧은체)는 절제되고 정돈된 로만 스타일을 따르고, Italic은 라틴 손글씨의 문체가 극대화되어 서로 대비되는 인상을 줍니다. 이음획은 공통되는 표현 요소로서 이 둘을 연결하여, 두 스타일이 하나의 가족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아직 폰트의 이름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인상을 잡는 데 있어 두가지의 개념이 충돌-융합하는 모습을 모티프 삼았습니다. 야누스, 잔 파도, 경계, 백조, 개화 등 말이죠. 제작이 차근차근 진행되어 서체가 제 얼굴을 갖추어 감에 따라 신화나 문학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들을 예비 폰트명으로 많이 추천받았습니다.
이탤릭을 위한 초기 스케치
더 조화롭게, 더 우아하게
「SD 프시케」엔 라틴 문자와의 조화를 위한 고민들이 많이 숨어있습니다. 겉으로 가장 잘보이는 요소부터 설명하자면, 세로줄기의 부리는 영문 소문자의 기둥에 위치하는 세리프의 각도와 맞췄고, 가로줄기에선 펜촉을 눕혀 쓰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줘 일반적인 명조체형 글자들과 다르게 가로도 세로도 그 시작부가 역방향 형태입니다. 이 방식은 이탤릭 획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한글 구조와의 조화, 우아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라틴 알파벳은 올드스타일 세리프(Oldstyle-serif)를 기본 구조로 잡았습니다. 깃펜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앞서 설명한 직선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탤릭의 쓰기 방식도 해당 시기의 스타일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음획이 이미 화려하기 때문에 노이즈를 줄이기 위해 세리프의 규모는 작아졌습니다. 제작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점점 모던 세리프의 이미지가 많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한글과 라틴의 생김새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러 테스트를 거쳤는데요. 한글의 인상에 비해 아웃라인이 둥글둥글한 라틴 문자를 한글과 더 어울리게 하기 위해 단단한 직선부가 더 강화됐습니다. 이탤릭에서 한글의 부리가 영문보다 세리프보다 부드럽게 처리한 것도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n, d가 좋은 예시입니다. 반대로 한글은, 딱딱해보이는 인상을 덜어내기 위해 더 부드러운 곡선 표현이 강화되었죠.
화려한 스타일의 스와시(Swash) 대문자들 역시, 라틴 알파벳이 한글에 비해 이음획의 빈출도가 적었기 때문에 한글과 더 잘 어울리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이탤릭 라틴 소문자에서 마지막 획 끝을 늘려 다음 소문자에 닿게 만드는 더 손글씨적인 모습도 고민했으나, 짧게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습니다.
한글 이탤릭 폰트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있다면, 바로 한글 이탤릭을 디자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한글 폰트에서 단독으로 디자인된 이탤릭 스타일 폰트, 단순 기울임 스타일의 폰트는 많았으나 이렇게 이탤릭 본연의 의미를 담아 곧은체와 함께 패밀리에 묶기를 시도한 서체는 참고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Upright와의 확실한 인상 차이를 위해 더 화려해야 했습니다.
라틴 알파벳을 먼저 언급하자면, 손글씨의 방식을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자폭도 자간도 Upright보다 좁게 설정했습니다. 대신 세리프의 길이는 더 강조했죠. 기본 기울기는 15°이나 기둥의 길이, 위치에 따라 각도 보정이 들어갔습니다. 모든 선 끝은 곡선 값을 주었습니다. 선과 선의 연결은 더 유기적으로 닿게 디자인했습니다.
한글 이탤릭은 라틴 알파벳의 주요 원리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한글 이탤릭만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글자의 무게중심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야 하며, 수평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로줄기 시작부 부리를 더 아래로 길게 내리고 ㅅ 계열의 왼쪽부를 왼쪽 아래로 더 길게 늘린 것이 주요한 방법입니다.
또한 한글은 산술적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Upright와 비교해 길쭉해보입니다. 그래서 자폭을 줄이지 않고, 초성의 높이들을 밑으로 조금 조정했습니다. 그리고 가로줄기로 시작하는 자소들을 조금 더 길게 늘려 오른쪽으로 쏟아져보이지 않게 균형을 잡았습니다.
받침에선 우측 하단 중심을 더 단단하게 표현해 안정적인 균형으로 보이도록 했습니다. 또한 우측으로 기울기 때문에 받침이 왼쪽으로 과다하게 튀어나와버릴 수 있기 때문에 너비를 조금 줄였습니다.
심볼(그림 문자) 경우, 모든 글자를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산술기호, 원기호, 화살표 기호는 역할, 기능을 분명히 하기 위해 Upright의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더 들어보고 싶네요.
마치며: 또 다른 프시케?
기본 글립에 담지 못한 다양한 형태는 오픈 타입 피처에 맡겼습니다. 위첨자 아래첨자 표준합자 같은 기본 기능 외에도 특별한 인상을 가미하기 위해 올드스타일 숫자, 이탤릭 한정 장식적인 대문자(swash), 화려한 세로모임 민글자를 추가했죠. 사용자 분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주시고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폰트가 저의 5년 만의 첫 한글 작업이라면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많은 멀티스크립트 프로젝트에 몸담고 있다가 이렇게 작은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오히려 많은 분들이 이 폰트의 디자인이 신선하게 느끼실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사실 「SD 프시케」는 더 큰 패밀리로 기획된 폰트라는 걸 아시나요? '표현 목표’에 짧게 언급했는데요. 정말로 기획 당시 디스플레이용 폰트로서 보다 더 돋보이는 역할을 하기 위한 두꺼운 웨이트, 꽉찬 스타일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SD 프시케」가 사용자분들의 마음에 쏙 드셔서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확장 스타일로 다시 찾아오는게 꿈이 아닐지도…
작성자: 산돌 디자인스튜디오 마기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