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폰트 중 하나입니다.
박수현 디자이너는 가장 멋진 폰트 디자이너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요.
인터뷰를 빌미로 이것저것 여쭤보며, 수현 디자이너의 시각을 살짝 엿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초기 시안과 수정 사항이 기록된 노트까지! 여러분에게 「SD 정체」를 더욱 생생하게 전합니다.
Q. 590, 690 안의 숫자 ‘9’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SD 정체」에게 있어 ‘9’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체」의 이름 뒤에 붙은 세 자리 숫자 중 두 번째 숫자는 폰트의 무게를 의미해요. 숫자가 높을수록 무거운 웨이트가 됩니다. 무게니까 ‘9’는 ‘9g’, ‘3’은 ‘3g’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무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정체」에서는 본문용 기본 웨이트인 레귤러를 두 번째 자리 숫자 ‘3’으로 하였으며, ‘9’는 볼드면서 가장 무거운 웨이트를 의미하죠.
Q. 볼드 웨이트인 590, 690은 레귤러 웨이트인 530, 630과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요?
우선 한글의 글자 너비가 다릅니다. 530, 630은 한글의 글자 너비가 모두 1000unit으로 같은데, 590, 690은 일부 계열의 너비가 1020unit으로 다릅니다. 볼드가 되어도 글자의 인상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획들이 너무 붙어 보이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고민 끝에 일부 계열 글자들만 글자 너비를 넓혔습니다.
또한, 가로획과 세로획의 획 대비가 좀 달라요. 획 대비가 530, 630보다 약간 큽니다. 볼드로 가면서 획 대비가 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정체」의 경우는 획 대비가 아주 커지지는 않게 하였습니다.
*unit: 폰트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인 ‘Glyphs’에서 글자틀의 너비와 요소 간 간격을 정의하는 최소 측정 단위
(위)세련된 인상의 세리프 폰트, 「Artusi Grande」
Q. 볼드로 가면서 획대비가 커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셨는데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틴 폰트에서는 웨이트가 두꺼워질 때, 가는 획은 그렇게 많이 두꺼워 지지 않고 두꺼운 획만 더욱 두꺼워져요.
특히 세리프 폰트에서는요. 그리고 한글 민부리에도 그런 특징이 보였구요. 민부리의 경우에는 복잡한 글자 구조에서는 어차피 가로획을 두껍게 하는덴 한계가 있어요. 더 들어갈 데가 없어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늘어질 수밖에 없죠.
해서 전체적인 무게감을 잡을 때도 세로획의 두께로 먼저 중심을 잡는 것이 더 쉽고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체」 590과 690은 제목용으로 디자인된 것이잖아요? 가로획과 세로획이 함께 두꺼워지면 뭔가 둔한 느낌이 있었어요. 아무리 다듬어도 말이죠. 뭔가…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획대비가 늘어나며 생기는 세련된 인상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Q. 노트의 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한 기록인가요?
수정 사항을 기록한 거예요. 디지털 화면과 실제 출력물이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교정쇄를 내어 의도한 형태가 맞는지 확인합니다. 이 교정쇄를 보며 수정할 사항을 체크하고 또 수정하죠. 늘 처음부터도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써서 작업하지만 조판을 보면 달라 보이고, 또 달라 보이곤 합니다…
Q. 그렇다면 교정쇄의 체크 표시는 어떤 부분을 수정하기 위한 것일지요?
여기 체크한 부분과 노트 필기를 대조해 어떤 부분을 수정했는지 보여 드릴게요.
Q. 제작 과정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궁금해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획 두께를 조정하는 일이였어요. 획이 많아질 때 글자가 엄청 진해 보이지 않도록 획 두께를 지정해서 만들었지만, 만들어 놓고 많은 글을 조판해서 보면 획이 많은 글자들이 여전히 눈에 띄게 진하게 도드라져 보여서 여러 차례 조판하면서 획 두께를 조정해야 했죠. 그리고, 530과 630의 뼈대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아서, 서로 다른 부분들을 적용하되 너무 다르지 않은 뼈대를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530, 630, 590, 690을 교차 확인하는 일 또한 품이 많이 들었습니다. 630이 좀 더 오밀조밀한 느낌이라면 530의 자소가 쪼-오금 더 크고 공간도 시원시원한 느낌이예요.
Q. 끝에 끝까지 수정 작업이 반복되었던 부분이 있으셨나요? 있으셨다면 어떤 부분인지 알려주세요.
이번뿐만 아니라 항상 끝까지 수정해야 하는 부분인데요, 글자의 중심을 잡는 부분입니다.
글자에는 시각적 무게 중심이 있는데, 정체의 경우에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ㅏ, ㅑ, ㅘ 같이 기둥에 곁줄기가 붙은 글자에서 곁줄기 높이에 따라 글자의 전체적인 무게 중심이 달라지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곁줄기 높이를 조정하는 데에 항상 애를 먹고 있습니다.
또 세로모임 글자에서는 닿자와 받침이 어느 한쪽으로 쏠려 보이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수정하였습니다.
닿자의 높이와 크기도 글자의 무게 중심과 뼈대와 연관이 있어서, 이 부분도 조판하면서 계속 수정하였습니다.
(위)라틴 초기 시안 대공개!
Q. 영문과 숫자 디자인의 방향성? 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우선 한글과 영문은 서체의 역사가 다르므로, 정체처럼 시대성이 자족 구분의 한 축이 되더라도 한글과 영문에 정확히 같은 시대를 대입하기는 어려워요. 따라서 영문과 숫자는 특정 시대에 얽매이기보다 형태적 특징과 인상에 기반하여 접근하였습니다. 530, 630은 펜이나 붓으로 쓴 글씨체의 뼈대와 획을 참고했기 때문에 730~030보다 손글씨의 느낌이 더 살아있는데, 이에 맞춰 영문과 숫자도 펜으로 쓴 획의 모습이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올드 스타일(Old style)” 계열에 속한 서체들의 뼈대를 참고하여 한글 인상에 맞게 디자인하였습니다.
Q. 한글 문장부호와 한글 텍스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떤 점을 고려하셨나요?
예로 하이픈의 경우 가로획의 두께보다 얇게 보이는데요, 혹은 문장부호와 한글이 함께 사용되었을 때 어떤 인상으로 보이길 기대하셨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문장부호는 화자의 호흡을 생생히 담아 내도록 큼직하고 뚜렷하게 만들었습니다. 작은 크기로 쓰였을 때 문장부호들끼리 잘 구별되도록 하였고 (예를 들어 쉼표의 꼬리 길이를 충분히 길게 해서 마침표와 구별되게 하였고) 디자인은 한글과 비슷한 인상을 가지게 해서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하이픈 같은 줄표류와 괄호류 경우는 한글보다 약간 배경으로 물러나는 느낌이 되도록 무게감을 덜 주었습니다. 볼드에서는 특히 문장부호들이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줄표류, 괄호류 경우는 한글의 무게감이 늘어나는 정도로 똑같이 무게감이 늘어나면 둔해 보이기 쉽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으므로 다른 글자들에 비해 무게를 더 뺐습니다.
Q. 수현피디님이 생각하는 「SD 정체」의 적정 크기와 적합한 용도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자간이나 행간도 추천하는 수치값이 있으실지요?
530~030은 10pt 내외의 작은 크기로 본문을 조판하기에 적합합니다. 테스트는 7~11pt까지 해봤고 모두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10pt를 가장 중점에 두고 만들었습니다. 글줄사이는 글자 크기가 10pt일 때 19pt 정도로 하고 테스트했는데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가장 어울리는 글의 장르는 530, 630은 문학, 730, 830은 문학과 인문, 930, 030은 다양한 종류의 글에 모두 어울립니다.
590, 690은 18pt 이상의 크기로 제목이나 길지 않은 문장을 조판하기에 적합합니다. 11~36pt까지 테스트하며 만들었지만 18pt 정도 크기에 가장 어울렸습니다. 글줄사이는 글자 크기가 18pt일 때 30pt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자간은 위에서 언급한 적정 크기로 사용할 때에는 만들어진 그대로 0으로 두고 쓰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Q. 「정체」 590, 690은 포스터에서도 아주 아주 큰 크기로 많이 쓰일 것 같아요. 100pt 이상의 큰 글자 크기에서의 자간이나 행간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음…이건 잘 모르겠어요. 위의 가이드가 조금 제한적이긴 하지요? :) 530과 630은 자간을 0으로 두고 쓰는 것을 꼭 권장하고 싶은데 590, 690은 모르겠어요. 디자이너분들에게 달린 것 같아요. 작업물에 맞는 적절한 자간과 행간값을 찾아가야 하겠지요.
Q. 썼을 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문장이 있을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590, 690은 문학용으로 쓰이는 것을 주요 용도로 생각하고 만든 530, 630의 볼드 버전이기때문에 아무래도 문학적인 내용의 문장들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중얼거리는 듯한 독백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