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8일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한 산돌 사이시옷: 타입 컨퍼런스 탐구하는 사람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들여 쌓아온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탐구해온 결과를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션마다 진행된 Q&A에는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총 200건이 넘는 질문이 쏟아질 만큼, 현장은 탐구의 열기로 가득했는데요.
미처 다루지 못한 인사이트 넘치는 질문들도 많았습니다. 산돌은 행사 이후 연사분들께 다시 한번 질문을 드려, 현장에서 이어지지 못했던 이야기와 생각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산돌 타입 디자이너 장가석
― Q1: 「SD 초양」은 원전에 기반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폰트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과거의 것을 참고하되, '어디까지가 참고'이고 '어디서부터가 나만의 해석'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으셨나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 제가 뭔가 연구해서 논문을 써야 할 것 같네요. 사실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SD 초양」같은 경우에는 폰트 디자이너의 감각으로 원전 글자에서 느껴진 부담과 매력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부분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 글자들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활자의 의도와 구조적 맥락을 먼저 이해한 뒤, 조형적으로 너무 과하지 않게 또 전체적인 디자인의 통일성과 균형을 기준으로 정도를 조정해 「SD 초양」만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원전에서 확실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과감하게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많이 공부하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과연 내가 이런 기준이나 프로세스를 만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 있었거든요. 이런 프로세스는 다소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폰트 디자이너로서 이런 시도야말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Q2: 「SD 초양」의 경우 역입평출 같은 전통적인 쓰기 방식에서 영향받았다고 하셨는데, 라틴 알파벳이나 다른 언어의 폰트를 디자인할 때도 해당 언어권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으셨을까요?
산세리프 폰트 안에서도 다양한 분류가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쓰기 방식에서 나온 표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SD 초양」 라틴의 경우, 한글의 조형적 특징과 Early Grotesque 계열의 시대적 배경을 공유합니다.
「SD 초양」의 라틴은 정태영 디자이너님께서 디자인해주셨는데요. M, V, X 등 대각선 획의 굵기 대비가 라틴 캘리그라피와 Serif 양식에서 적용되는 굵기 대비처럼 미세하게 남아있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Q, r, f 등에서 획의 끝이 둥글게 말리는 형태 역시 현대적인 네오 그로테스크 산스보다 쓰기 방식을 더 많이 담아 표현했습니다.
「SD 초양」의 라틴
― Q3: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상황에서 한글 폰트를 디자인하실 때 겪으셨던 어려움이나 흥미로운 경험이 있으신가요?
한글의 쓰기 방식은 한국에 유학 와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습니다. 한글 표현에 대해서도 같은 동아시아권에서 비슷한 도구인 붓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한국어를 배워도 한글 폰트를 만드는 데 있어 특정 구조에서 나오는 인상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적, 시대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처음 안상수체를 봤을 때, 기하학적인 탈네모틀의 구조가 너무 신선하고 현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국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상수체는 90년대에 나온 파격적인 폰트라 현대적이기보다는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 감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문화적, 시대적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초반에 한글 디자인을 할 때 특정 구조에서 나오는 인상을 파악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SD 초양」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탐구해보고 싶었고, 앞으로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면에 외국인으로서 흥미로운 경험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가석체의 쌍기역은 시안 "꼬"자에서 나온 형태입니다. "ㅗ"의 짧은 기둥이 쌍기역의 왼쪽 기역 획과 충돌해서 완전히 곡선으로 그려 공간을 양보했고, 오른쪽 기역은 같은 이유지만 반대로 완전히 직선으로 그렸습니다. 다른 한국분들은 되게 이상하다고 했는데, 저는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설득될 수도 있고, 그냥 우리가 눈으로 봤을 때 익숙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거지 사실 맞다 틀리다는 없는 것 같았어요. 제가 외국인이라 잘 모르겠다는 핑계로 조금 특징적인 형태로 갔습니다.
가석체의 쌍기역 형태
― Q4: 최근 들어 타입 디자인의 중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는데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어떤 방향이나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요? 폰트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폰트를 그리는 것에 대한 감각이라고 한다면, 일단 많이 보고 많이 그려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만 그리면서 '내가 왜 이렇게 그렸는지' 생각하면서 그려야 해요. 저도 항상 그렇게 하거든요.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도요.
단순히 예뻐서 그렸다고 하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물론 컨셉추얼한 폰트 혹은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저 같은 경우에는 폰트가 사람들이 쓰는 도구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기준이나 논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많이 그리면서 답을 찾으려고 책도 보고 논문 같은 자료도 찾아보면서 자연스럽게 폰트에 대한 감각도 늘었던 것 같습니다.
민음사 북 디자이너 황일선
― Q1: 엿가위, 창문 빗살 같은 비유로 「SD 초양」의 인상을 표현해 주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SD 초양」을 사용해 보시면서 또 다른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으셨나요?
조선시대 구한말 복식이나 거리 풍경 등이 연상되었던 것 같습니다. 유전적 기억이라고 할까요? 구한말 수입되던 신식 문물의 클래식한 모습보다는 일상적인 소박한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 Q2: 북디자인은 폰트와 특히 밀접한 분야인 만큼, 폰트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아 보이는 사례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분석해가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이해 되고 자기만의 분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분석을 위해서는 폰트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와 타이포그래피 원리 등에 대한 선행 학습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Q3: 일상에서 책이나 인쇄물을 볼 때 북디자이너로서 자연스럽게 주시하게 되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들이 궁금합니다. 또 디자이너님께서 생각하시는 '잘 만들어진 북디자인'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느낌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직업병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북디자인이라고 한다면 정교한 타이포그래피,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장정, 내용을 전달하는 극적인 아이디어, 새로움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민본
― Q1: 활짝명조는 스코프가 길고 작업량도 방대해 보이는데요, 개발에 소요된 시간과 리소스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활짝명조'라는 이름은 어디서 영감받으셨나요?
소요 시간: 영국 레딩대학교 석사과정에서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 약 13년 전 입니다만, 생업으로 인해 실제 작업 시간은 몇 년 안 될 것입니다. 그간 지속적인 발견과 연구와 시행착오가 있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 등지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이 더해졌고, 기술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주는 등, 여러 요인이 어우러지며 원안이 계속 수정·확장되어 왔습니다.
리소스: 초기에는 막연히 ‘근·현대 한글 본문체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 싶다'라는 의욕 같은 것이 있어서, 특정 활자의 구체적인 조형에 집착하기보다는 역사적인 '계보'와 '구조'를 먼저 파악하려 했습니다. 세계 각지 도서관에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근·현대 한글 인쇄물이 소장되어 있어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몇몇 연구단체/회사들과 현재까지도 사료를 기반하여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름에 대하여: '활짝명조'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부사로서 ‘활짝’은 ‘시원스럽게 열리거나 트인, 혹은 꽃이 핀, 상태나 모양’ 등의 뜻이 있고, 동시에 '활자의 궤짝'을 의미하는 약자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를 ‘명조’체에 붙여 다양한 함의를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내용을 섞어 담고 있습니다.
•서서히 잊혀져가는 한글 본문체의 역사를 다시 '활짝' 드러내고 싶다는 의도.
•'명조체' 라는 단어가 가지는 다소 옛스럽기도 하고, 암울했던 근현대 역사를 상기시켜 뭔가 ‘구리게’도 느껴지는 인상을 열린 태도로 재해석하고 싶다는 바램.
•활자가 어지럽게 뒤섞인 커다란 '궤짝'을 정리·정돈해보고 싶은 야욕.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활짝 열린 자세를 제안하고픈 마음.
― Q2: 현대 한글 활자의 원형을 일군 세 분의 정신을 이어온 폰트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디자이너로서 과거의 것을 어디까지 참고하고 어떻게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할지 기준을 잡기가 어려워서 질문드립니다.
‘난/우린 지금 동시대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안하고, 어떤 기여를 하고 싶은걸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어떻게 내리냐에 따라 과거를 어디까지 참고할지, 혹은 참고할 필요가 있긴 한지 자연스럽게 기준이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활짝명조 프로젝트에서는 목표 자체가 '한글 활자의 역사를 조망하고 정리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들을 적극적으로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한글 본문용 명조체의 큰 흐름이 사실은 하나의 원류에서 갈라져 나왔고, 셋 정도의 주요 지류로 정리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활자의 크기(옵티컬사이징)'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하나의 축에 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정리는 제가 오늘 한글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이자 깨달음입니다. 여기에서 과거의 것들은 제 목표를 위한 '도구'이지, 재현이나 복원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나의 제안’이 과거를 딱히 참고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게 있을지 의문이지만), 가령 예를 들어, 다른 시지각을 지닌 외계인이나 인공지능 디바이스를 위한 한글 사이니지 시스템에 대한 것이라면, 소화할 과거의 양이 적을 수도 있겠죠...(?)
― Q3: 강연 자료와 폰트 룩 이미지에 계속 사용하고 계신 배경 패턴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특별히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평소 저는 현대 타입디자인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20세기 네덜란드 활자 디자인을 자주 언급합니다. 실제로 이 사례들은 제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고요. (사이시옷의 강연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죠.)
그 시대 출판된 한 네덜란드 책 표지에 실제로 사용된 마블링 패턴을 스캔해 비례와 색상을 변형하여 배경으로 사용하여, 그 시공간의 문화적 풍취를 시각적으로 녹여 넣고 싶었습니다.
마블링 패턴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유기적인 형체가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 움직임이 제게는 종종 마치 세계 각지에서 인류 문화가 꽃피고 시드는 역사적 흐름을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약하자면, 강연 주제와 제 활자디자인을 연결하는 일종의 “배경적 서사”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활짝명조 폰트 룩에 사용된 마블링 패턴
― Q4: 작업하실 때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과 분석적인 접근을 어떻게 균형 있게 통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경우 그 둘은 한꺼번에 발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먼저 직관이 생기고 분석이 따라오거나, 반대로 분석적 사유의 결과로 직관적인 감각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도파민이 제공하는 쾌감이 ‘쩝’니다.) 늘 이 둘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다 보니, 따로 균형을 잡기에는 서로 이미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습니다
시싸이드 시티 대표 전우성
― Q1: 트렌드에 편승해 순간적으로 주목받다 사라지는 '패스트 브랜딩'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브랜드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어떤 전략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무엇보다 트렌드를 편승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트렌드는 일종의 유행인데요. 유행은 계속 바뀌고 또 지금의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곳은 이미 차고 넘칠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 브랜드만의 차별화된 무언가를 발산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만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더 탄탄히 하는 것입니다. 트렌드를 쫓기보단 우선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만의 모습과 이미지는 트렌드를 따라다니면 절대 만들 수 없습니다.
― Q2: 그동안 '한 끗의 새로움'으로 브랜드를 차별화하는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비슷비슷한 비주얼과 톤앤매너가 과잉인 지금, 디렉터님이 생각하시는 차별화란 무엇인가요?
결국 경쟁사와 우리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우리만의 가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생각하는 브랜딩의 정의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비슷한 비주얼과 톤앤매너가 과잉이라면 전략적으로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차별성은 넘쳐나는 경쟁 속에서 한 번이라도 우리를 더 쳐다보고 관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코코 샤넬의 명언이 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늘 달라야 한다.” 즉 차별화란 우리 브랜드를 시장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Q3: 브랜드 개발과 전략 수립 등 브랜딩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 일상에서 실천하고 계신 루틴이나 습관이 있으신가요?
특별한 루틴이나 습관은 없습니다. 그보단 다양한 것을 많이 경험하려 노력합니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시각적 자극이나 다양한 영감이 있는 곳이라면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방문해서 보고, 듣고, 느끼려 합니다. 일상에서의 다양한 영감과 자극이 브랜딩 전략, 특히 그 중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현함에 있어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위해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을 지금 내가 고민하는 브랜드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루틴이나 습관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 Q4: 디렉터로서 함께 일하고 싶은 팀원은 어떤 사람인가요? 예를 들어 여러 영역을 폭넓게 경험한 제너럴리스트나, 특정 분야에서 깊은 전문성을 쌓은 스페셜리스트 등 어떤 성향의 팀원을 선호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너럴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구분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담당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성공시키려면 일반적인 사고와 생각, 태도로는 쉽지 않겠죠.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는 뾰족한 감각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뾰족한 감각을 가지려면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크리에이티브,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열정에는 끈기와 노력 그리고 태도가 동반되죠. 그래서 이것은 단지 제너럴리스트나 스페셜리스트로 나눌 수는 없는 역량 혹은 성향인 것 같습니다. 이 외에 그들이 부족한 부분은 제가 채우면 됩니다.
호라이즌 유니온 대표 송호성
― Q1: 프로젝트가 론칭된 후 사용자 반응을 리서치할 때, 어떤 지표나 피드백을 중요하게 살피시나요? 정성적 반응은 좋지만, 정량적 수치가 따라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표를 3단계로 봐요. 론칭 직후엔 앱 리뷰·CS 문의 같은 즉각 반응, 4-8주 차엔 전환율·체류시간 같은 적응 지표, 3개월 후엔 MAU·객단가 같은 장기 성과를 트래킹합니다.
정성적 반응은 좋은데 수치가 안 따라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첫째, 측정 시점이 빠른 경우 - 사람들이 "좋다"고 말해도 습관 바뀌려면 시간 걸려요. 둘째, 실제 문제가 있는 경우 - 예쁜데 불편한 거죠. 이럴 땐 "좋다"고 말한 사람들의 실제 사용 로그를 뜯어보고, 코호트 분석으로 세그먼트 별로 다시 봐요.
무신사 때 재밌었던 게, 20대는 바로 적응했는데 30대는 한 달 넘게 불만이었어요. 근데 6주 차부터 30대 전환율이 오히려 더 높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최소 3개월은 기다려야 하고, 정성적 반응 좋으면 방향은 맞은 거니까 "뭐가 막혔나?"만 찾으면 돼요.
― Q2: 커리어 패스에 변곡점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직 및 독립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궁금한데요. 어떤 지점에서 갈증을 느끼실 때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나요?
솔직히 계획적이지 않았어요. 매번 "이러다 안 되겠다." 싶을 때 움직였죠. 네이버에선 12년 하다 보니 루틴해지고 이 안에서 배우는 것보단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렇다고 런드리고나 무신사를 갔다고 해서 더 큰 성장을 했다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공통점은 네 가지예요. 학습 곡선이 평평해질 때, 임팩트의 한계가 보일 때, "10년 뒤에도 이 일 하고 있을까?" 상상했을 때 답답할 때,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몸은 거짓말 안 하거든요.
다만 갈증만으로 움직이면 안 돼요. 저도 매번 최소 6개월은 고민했어요. "이 갈증이 환경 문제인가 내 문제인가?", "지금 배울 걸 다 배웠나?", "새 곳에서 내가 줄 가치가 명확한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나서 움직였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니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 Q3: 연차가 쌓이면서 디자이너로서 C레벨을 설득하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집니다. 대표님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신 적이 있으신지, 있으셨다면 구체적인 사례나 설득 노하우를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히려 연차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기대치가 올라가니까요. 초반에 실패를 연습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무신사 때는 디자인 전략 문서 같은 걸 공들여 준비해도 "이거 하면 매출 얼마나 올라요?" 한마디에 이렇게 일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제가 "일관된 경험", "브랜드 정체성" 같은 디자이너 언어로 말했는데, 경영진 레벨에서는 "매출", "전환율", "LTV"로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접근을 완전히 바꿨어요. PPT 첫 장부터 숫자로 시작 - "비패션 카테고리 성장 정체", 경쟁사 분석으로 맥락 제공, 구체적 숫자로 임팩트 제시 - "뷰티 스토어 독립하면 전환율 2.5배, 1년 내 2,000억 목표", 같은 비즈니스 임팩트 요소를 먼저 꺼내서 디자인 실행 방안을 제시했어요.
핵심은 이런 거예요. 그들의 언어로 말하기, 문제→기회→솔루션 순서, 숫자에 스토리 입히기, 리스크 먼저 꺼내기, 단계적 접근 제시하기. 그리고 "OO 대표님, 고민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로 시작하면 '제안'이 아닌 '상담'이 돼요. C레벨 설득은 디자인 실력이 아니라 비즈니스 이해도 싸움이에요.
― Q4: 이미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가 고착된 상태에서는 새 강점을 생각해 내기 어려운데 어떤 식으로 강점이나 감성 포인트를 잡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경험상 고착된 이미지는 없어요. 고착된 시선만 있을 뿐이죠.
저도 몇 가지 방법을 쓰는 것 같네요. 첫째, "우리 브랜드 안 쓸 때 뭐 쓰세요?" 거꾸로 물어보기. 런드리고 때 이렇게 물으니까, "주말에 빨래하느라 하루 다 간다"라는 답이 나왔고, 고객이 원한 게 세탁이 아니라 "시간 확보"란 걸 알았죠. 둘째, 숨겨진 DNA 파내기. 무신사는 원래 커뮤니티로 시작했거든요. 그걸 찾아서 스냅 기능을 강화했어요. ‘남들의 패션 스타일 훑어보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 옷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셋째, 경쟁자가 못 하는 것 역으로 찾기. 버프즈 때 위버스는 하이브만, YG셀렉트는 YG만 하니까 우리는 멀티 레이블로 차별화했죠. 넷째, 과거 자산을 재해석하기. "30년 된 카페"를 "낡았다"가 아니라 "세대를 잇는 공간"으로 프레이밍하는 거예요.
실전에선 브랜드 해체해서 인식과 현실의 갭 찾고, 고객 관점에서 "왜?"를 끈질기게 물어보고, "만약 우리가 패션 브랜드라면?" 같은 프레임 전환 워크샵하고, A/B 테스트로 검증해요. 제가 항상 하는 질문은 "우리가 내일 망하면 고객들이 뭐라고 할까?" - 그 빈칸이 진짜 강점이에요.
CFC 대표 전채리
― Q1: 대표님의 주니어, 시니어 시절이 궁금합니다. 그 시간 동안 겪으셨던 고민과 깨달음이 궁금합니다. 이 시기의 디자이너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좋은 컨셉은 치열한 고민과 해석에서 나오고, 좋은 조형은 치밀한 눈과 손, 무거운 엉덩이에서 나옵니다. 좋은 디자인은 단숨에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의 프로젝트를 프랙티스로 생각하고, 디자이너로서의 긴 여정을 성실하게 밟아나가며 나아짐의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 Q2: 브랜드 디자이너에서 브랜딩 디렉터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역량과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디렉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나 조언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디렉터는 큰 그림을 보는 능력과 메타인지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임하며 각 단계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한걸음 떨어져서 전체 그림을 바라보는 감각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디렉터의 관점 뿐만이 아닌 디자이너의 시각, 클라이언트의 시각 등 프로젝트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함께 읽어낼 줄 아는 것도 디렉터가 가져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Q3: 폴라 쉐어의 명언과 함께 레터링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 세계가 열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경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의 작업 방식이나 디자인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오랜 기간 로고타입을 만지고 다루다보면 글자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곡선의 뉘앙스에 따라 글자의 성격이 바뀌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 로고타입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처음으로 깨달았던 프로젝트가 런드리고입니다. 그 이후 견고한 조형미를 갖춘 단단한 로고타입을 그리는 데에 더욱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Q4: 칠성사이다 리브랜딩에서 Cider-> CIDER로 로고에서 대소문자 표현이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번 리뉴얼을 통해 Chilsung을 글자를 넘어 이미지로 인식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일곱 개의 별이 결합된 견고한 로고타입을 강조하기 위해 CIDER는 상대적으로 힘을 빼려고 했고요. 윗공간이 들쭉날쭉할 수 있는 소문자 대신 안정적인 공간 값을 지닌 대문자를 선택했고, 크기도 줄였습니다.
출처: 칠성사이다 - 롯데칠성음료
현대백화점 디자인전략 팀장 박이랑
― Q1: 디자인 작업에서 자신감이 결과물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자신감을 잃는 순간이 찾아올 때, 어떤 방식으로 회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시나요?
지금은 잊혀진 기억에 가깝지만, '언제든지 나는 디자이너나 예술가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일을 하더라도 나는 나이며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직업적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존재하고 중요하지만, 저는 이 두 개념(직업적 자존감과 개인의 가치)을 분리한 채 작업할 때 회복탄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 Q2: 에이전시 디자이너에서 독립 스튜디오를 운영하시다가, 다시 인하우스로 합류하신 여정이 인상적입니다. 각 전환점에서 어떤 득과 실을 고민하셨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학부 졸업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독립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창업가로서 또는 사업을 운영하면서 배우는 것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매니지먼트에 더 힘을 써야 하는 측면이 커져 작업에 집중할 시간이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 제 연차에는 아쉬움으로 느껴졌습니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클라이언트를 만날 수는 있었지만, 광범위한 장르의 디자이너, 아티스트들과 협업(콜라보)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회 관계망이 지금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 쉽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저의 성장을 가로막는 점으로 느껴졌습니다.
― Q3. 현대백화점의 브랜딩 정립과 확장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앞으로의 시각적 결과물들도 기대됩니다! 강연 중 보여주신 해피니스 산스의 개발 목적과 히스토리가 궁금해집니다.
해피니스 산스는 여느 기업 서체처럼, 시대에 맞는 기업의 온·오프라인에 쓰일 폰트가 필요하여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에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서체는 기존에 없었기에 더욱 절실했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디렉션에 있어서, 타이틀 폰트는 브랜드의 인상을 담아 개성 있고 차별화된 조형성을 가져가고자 했고, 본문에 쓰일 폰트는 가독성 등 실용성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폰트를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브랜드 이벤트라고 생각하여, 해피니스 산스를 처음 접하는 인상과 경로 등을 현대백화점스럽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해피니스 산스의 소개 영상과 그래픽들을 보시면 미소가 절로 나오는 것을 경험하실 겁니다.
출처: thehyundaifont.com
― Q4: 강연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현대백화점은 오랜 기간 쌓아온 레거시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 중요한 선택을 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규모 조직 특성상 디자인적 관점을 일관되게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디자인 방향을 성공적으로 어필하거나 조직을 움직였던 사례가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늘 그렇듯이 모든 프로젝트에는 크고 작은 설득이 필수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회사 내부와 동료 간의 상호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의 논의가 가능합니다.
뜨거웠던 현장의 여운 속에서, 2025년 사이시옷이 남긴 생각과 질문들을 이어가는 데 이 아티클이 좋은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그럼 2026년 사이시옷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만나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