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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언어 사이의 타입 디자인

in sight of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

서체 하나에 아이디어 한 조각, 문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 장우석 디렉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 장우석 디자이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 지금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라틴 폰트와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장우석 님을 만났습니다.

이모지와 문자를 결합한 OS Akumoji부터
매년 새로운 언리미티드 에디션 공식 서체,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까지—
글자 위에 아이디어를 얹어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확장하는 그의 작업 철학과 프로젝트 비하인드를 만나보세요.

암스테르담에서 서울, 그리고 뉴욕까지


―안녕하세요, 우석님.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장우석입니다. 저희는 리테일 폰트부터 커스텀, 그래픽 디자인까지 다양한 디자인 서비스를 하고 있는 팀이에요. 사실 디자이너는 저 혼자이고, 개발자, 편집자, 매니저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협력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렌지 슬라이스’라는 이름이 독특한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사실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지어진 이름에 가까워요. 네덜란드 유학 시절 졸업을 앞두고 사업자 등록을 해야 했는데, 너무 진지하거나 전형적인 폰트 파운드리 이름은 피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OST(Original Sound Track, “Orange Slice Type”의 이니셜과 동일) 듣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상징색이 오렌지색이기도 해서 ‘Orange’를, 그리고 샤프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Slice’를 붙였습니다.

여담으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자막 오역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어요. 영화에서 앤트맨이 “누가 오렌지 슬라이스 좀 없냐(Orange slices)”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반응이 오역 아니냐, ‘오렌지 라이센스’를 잘못 번역한 게 아니냐고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그런데 실은 ‘오렌지 슬라이스’가 실제 사용된 표현이었고, 미국 운동선수들이 짧은 시간 안에 당 충전을 위해 오렌지 슬라이스를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유머러스한 에피소드가 꽤나 한국적인 느낌도 들고, 유쾌한 느낌이 좋아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계신데, 한글이 주류인 국내 시장에서 라틴 폰트 파운드리를 운영하는 현실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시장의 수요가 서구권과는 다를 것 같은데요.

그래서 사실 지금은 타입 디자인보다는 그래픽 디자인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수입의 90% 정도는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보시면 돼요. (웃음) 물론 저도 그런 일들이 계속 해오던 일이고 재미있어 하는 작업이기는 하지만요. 한국에는 딱 라틴 폰트만 요구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없기도 하고, 저도 당장 한글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어서요.

―그렇다면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은 타입 디자인만으로 범위를 제한하고 있는 팀은 아니군요. 앞으로 더 소화하고 싶은 범위가 있다면요?

저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해서 이미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어요. 사실 졸업할 때쯤 제일 빠져 있었던 건 책을 만드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등록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쥬스프레스’라는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고, 또 제가 AI 스타트업 ‘언에이아이’에서 디자인 총괄로도 일하고 있어요. 지금은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끌어모아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범위를 굳이 정한다고 하면, 제가 못하는 것 말고는 다 한다 이런 주의예요. (웃음) 폰트와 그래픽은 물론이고 책이나 문화 예술, 전시 쪽과 관련된 일은 계속 하고 싶고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의 작업들은 시각적으로 평범하지 않고 어딘가 독특한 ‘트위스트’가 느껴집니다. 디렉터로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론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타입 디자인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무조건 ‘아이디어’에서 출발합니다. 기존 소스를 리바이벌(revival)하거나 드로잉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명확한 컨셉이나 아이디어를 먼저 세우고 그것을 폰트로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단순히 미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의도와 컨셉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저는 문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언어적인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디자인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 작업은 말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유학 시절부터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메일로 소통하면서 글이 가진 명확한 힘을 체감했거든요. 글이 어떤 사안을 얼마나 명확하게 혹은 흐리게 만들 수 있는지를 경험하면서,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설명 가능한 형태에 더 집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는 편인가요?

저 스스로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사람을 두 가지 성향으로만 나눌 수는 없겠지만, 행동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저는 후자에 속하거든요. 생각이 끊이지 않고, 그 생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스스로 연습하는 것 중에 하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되거나 듣게 되거나 읽게 되면 그걸 제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다기보다는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고, 제 것으로 표현하려는 연습을 하는 편이에요.



Glyphs 글립스 폰트 작업창 화면 캡처 이미지

―아이디어 기반이어서인지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의 폰트들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형태가 돋보입니다. 하지만 폰트는 결국 읽혀야 하는 도구이기도 한데요. 폰트의 ‘가독성’에 대해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만의 기준이 있다면 ‘약속은 지키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를 그렸다면, 그게 ‘a’가 아닌 다른 글자로 읽히면 안 된다는 거죠. 문자의 기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정통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게 강점인 것 같기도 하고요. 특히 한글이 아니라 라틴을 디자인 하다 보니 더 재미있는 시도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방금 라틴 디자인에 대해 언급해 주셨는데요.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라틴 문자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신 적은 없었나요?

사실 이제는 기술이 좋아져서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보니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훨씬 관대해졌고요. 특히 라틴 디자인 쪽은 워낙 시장도 넓고 디자이너도 많다 보니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국적이나 출신에 따른 바운더리는 거의 없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오히려 아이디어나 콘셉트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자 위의 실험 한 조각


―리테일 폰트 중 「OS Akumoji」는 이모지가 결합된 방식이 굉장히 독특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업인가요?

제가 네덜란드에서 나온 첫 번째 학교,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에서 졸업 직전에 라우렌츠 브루너(Laurenz Brunner)와 율리아 본(Julia Born) 스튜디오로 6주간 워크숍을 가게 되었어요. 유명한 폰트 디자이너인 라우렌츠 브루너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서 이때 저도 폰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고, 그때 냈던 아이디어에서 발전된 것이 「OS Akumoji」입니다.

OS Akumoji 폰트 사용예시 이미지 - 01 OS Akumoji 폰트 사용예시 이미지 - 02

OS Akumoji


사람들은 ‘미안하면서 고맙고’, ‘기쁘면서 슬픈’ 양가적인 감정을 자주 느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 복합적인 마음을 이모지를 섞어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HAPPY”라고 썼는데 마냥 행복하지 않은 표정의 이모지가 튀어나오는 식이죠. 글을 쓰면 쓸수록 여러 감정과 의미가 중첩되도록 의도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시도해 본 디테일이 있었다면요?

이전까지는 흑백으로만 폰트를 구성했다면, 이때 처음으로 ‘회색도’를 넣는 시도를 해봤어요. 제가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의 스크린톤 같은 표현을 차용했는데, 자세히 보면 하트 안에 작은 하트들로 속을 채워서 멀리서 보면 회색처럼 보이게 만든 거죠.



OS Akumoji 폰트 타이핑 화면 캡처 이미지

―대문자와 소문자의 표현 방식이 다른 점도 눈에 띕니다. 대문자는 검은 원 안에 이모지가 있고, 소문자는 표정만 들어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잘 읽혀야 하는 ‘가독성’을 고려했어요. 소문자는 대문자에 비해 작은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대문자와 같은 요소를 넣었을 때 글자를 해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작은 도형들이 뭉쳐서 가독성을 해치지 않도록 소문자는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좋았던 피드백 중에 하나가, 딱 보면 안 읽힐 것처럼 생겼는데 막상 읽어보면 잘 읽힌다는 말이었어요. (웃음)




―또 다른 리테일 폰트인 「OS Cracker」는 조형적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들을 한데 모아둔 느낌입니다. 이 작업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나요?

「OS Cracker」 역시 학교 프로젝트에서 출발했습니다. 당시 과제가 ‘실크 스크린과 어울릴 만한 글자를 그려보자’는 것이었는데요. 처음부터 폰트를 염두에 둔 게 아니라 레터링에 가까운 작업이었죠. 네덜란드 디자인에서 자주 보이는 오버 프린트(overprint) 기법을 활용해보고 싶었고, 글자의 도형들이 만나는 지점들을 분해해 보면 재미있는 질감 차이를 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소문자의 x-height와 베이스 라인의 중간 지점을 기준으로 글자를 위아래로 분리해 그려본 거죠.

OS Cracker 폰트 사용예시 이미지 - 01 OS Cracker 폰트 사용예시 이미지 - 02

OS Cracker


―상하 분리뿐만 아니라 곡선을 꺾거나, 세로획을 분리하는 등 여러 가지 특징이 한 패밀리 안에 모두 적용된 점이 재미있어요. 보통 각각의 특징이 폰트 하나씩 적용되는 게 일반적일 텐데요.

아마도 처음부터 폰트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과제의 목적이 실크 스크린을 잘 표현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실크 스크린 작업을 직접 체험해보면서 그렸기 때문에 더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업 방식도 일러스트레이터로 하나하나 그려가며 작업한 뒤 나중에 글립스(Glyphs)로 옮긴 경우라, 더 불규칙하고 전형적인 폰트 같지 않은 면이 있죠.

서체와 쓰임이 만나는 순간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7(UE17) 현장 사진 - 01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6(UE16) 현장 사진 - 01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5(UE15) 현장 사진 - 01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4(UE14) 현장 사진 - 01

언리미티드 에디션 UE17 - UE14 현장 사진


―매년 열리는 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의 공식 서체를 꾸준히 작업해 오셨어요. 이 협업은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요?

처음에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주최 측에서 먼저 제가 제작한 폰트를 한번 써보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거기서 제가 한번 더 제안을 드렸죠, 제가 공식 서체를 만들어 드리겠다. (웃음) 그렇게 시작된 협업이 매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연례 행사의 공식 폰트를 만든다는 건 한편으로 부담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 작업에 있어서 제가 너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건, 저를 믿고 맡겨 주신 자유도가 되게 높은 작업이었어요. 부담도 전혀 안 주셨고, 제가 제안 드린 방향으로 최대한 잘 활용해주시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정말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죠. 오래 이어져 온 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고,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저도 서체 제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이었어요.

―매년 동일한 시기에, 심지어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인데요. 매년 다른 컨셉을 도출하시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주어진 키워드가 있을 때도 있고, 제가 평소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OS Same」이라는 폰트는 알파벳 사용 빈도(Frequency)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어요. 자주 쓰이는 모음(a, e, i, o u) 같은 글자는 폭을 좁게,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j, q, x, z)는 넓게 디자인해서 글자가 차지하는 스페이싱을 균등하게 맞춰보자는 아이디어였죠. 언리미티드 에디션 현장의 부스마다 크기도 다르고, 전시하는 아이템도 다른 그런 테마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OS Swash」는 ‘충돌’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해 글자들이 서로 부딪히는 형태를 만들었고요. 그 이후에도 밴 다이어그램, 책을 키워드로 매년 다른 서체를 제작해오고 있습니다.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5(UE15) 현장 사진 - 02, FONT: OS Same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4(UE14) 현장 사진 - 02, FONT: OS Swash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6(UE16) 현장 사진 - 02, FONT: OS Join
  • UNLIMITED EDITION 언리미티드 에디션 17(UE17) 현장 사진 - 02, FONT: OS Library

매년 다른 컨셉으로 제작된 언리미티드 에디션 공식 서체
순서대로 OS Same, OS Swash, OS Join, OS Library



―지금까지 제작하신 언리미티드 에디션 공식 서체 중에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서체가 있다면요?

올해 공개될 서체입니다. (웃음) 기대해주셔도 좋습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아이덴티티 및 그래픽 디자인: 박선경(EMC) 공간 디자인: 박길종 사진 기록: 임효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편집숍을 운영하는 ‘키오스크키오스크(KioskKiosk)’의 아이덴티티 작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로고를 새롭게 리디자인 하신 건가요?

네, 기존에 조현열 디자이너가 작업하신 서체 베이스의 아이덴티티가 있었는데 저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다만 기존 로고가 오래되기도 했고 굵기도 얇아서 범용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어서, 원래의 기하학적인 상태를 살리되 라운드 형태로 조금 더 두껍게 다듬었습니다. 특히 ‘kioskkiosk’라는 동일한 단어가 두 번 반복되는 구조라 중간의 ‘S’를 아래로 확 내려서 리듬감을 주었죠.

kioskkiosk 키오스크키오스크 브랜드 로고 아이덴티티 디자인 secondkiosk 세컨드키오스크 브랜드 로고 아이덴티티 디자인

키오스크키오스크(KioskKiosk) 서체

세컨드키오스크(SecondKiosk) 서체


―이후 세컨드 브랜드인 ‘세컨드키오스크(SecondKiosk)’를 위해 슬랩 세리프 버전으로 확장하셨어요.

이때 아예 다른 방향으로 해볼지, 자족을 확장할지 고민했었는데요. 라운드를 기반으로 슬랩 세리프로 확장하니 기존의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확실히 달라 보이는 포인트가 생기더라고요. 다행히 키오스크키오스크 쪽에서도 만족하시고 잘 사용해 주셔서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쿤스트인스티튜트 멜리(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프로젝트는 학생 시절 참여하신 작업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제가 다녔던 베르크플라츠 티포그라피(Werkplaats Typografie, WT)에서는 학교 외부의 실제 프로젝트를 가져와서 학생들이 직접 진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당시 이 미술관 프로젝트에 네 명의 학생들과 함께 팀으로 참여했습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디자인보다도, 미술관의 이름을 변경하는 안건이 중심이었어요. 비트 데 비테(Witte de With)라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시민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이름을 바꾸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저희는 이 과정에 아이덴티티 디자인으로 참여하게 된 거죠.



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웹사이트 홈페이지 화면

쿤스트인스티튜트 멜리(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웹사이트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폰트가 쓰이는 것을 고려했을 때, 특별히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맞게 고려하신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이 프로젝트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자유도가 높았고, 이름을 변경하자는 맥락도 시민의 목소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의견을 듣고 토론하고 아이데이션 하는 그 과정이 더 중요했거든요. 그래서 미술관을 위한 폰트를 만들기보다는, 어떤 이유나 의미를 담을 것인지가 더 중요했죠.

여기에 쓰인 폰트는 ‘교육’을 테마로 만든 「OS Melly Sans」인데요. 교육을 받는 디자이너의 위치, 즉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어색한 경계에 있는 그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서체였어요.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스케치 해가면서 서로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완성된 서체였죠.

Kunstinstituut Melly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텍스트, FONT: OS MElly Sans OS Melly Sans 폰트 견본 예시 이미지

OS Melly Sans


물론 미술관이라는 특성상 고려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미술관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방문하는데, 글자를 읽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이나 이민자가 많은 지역 특성상 조금 더 읽기 쉽게 다듬고 디테일을 수정하기도 했어요.


―학생 때 작업한 결과물이 지금까지도 기관의 아이덴티티로 쓰이고 있다는 게 뿌듯하실 것 같아요.

오래 사용되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걸 배웠어요. 아이덴티티 작업에 있어서 비주얼 가이드를 전달하는 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죠. 가이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디자이너가 적어도 1년은 함께 케어하며 자리를 잡도록 도와야 한다는 걸 그때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었거든요. 일반적으로는 브랜딩 가이드를 전달하는 것까지가 프로젝트의 마무리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도 이런 문화가 자리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현장 사진 - 01
  • 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현장 사진 - 02
  • 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현장 사진 - 03

쿤스트인스티튜트 멜리(Kunstinstituut Melly) 미술관 현장 사진

쿤스트인스티튜트 멜리(Kunstinstituut Melly)
Design with Alexander Tanazefti, Callum Dean, Emily Turner, Nina Schouten and Yan Zhihan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아이덴티티 작업에도 참여하셨어요. 국내 대표 영화제인 만큼 작업의 무게감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어떤 컨셉으로 진행되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보는 것도 너무 좋아해서, 이렇게 큰 영화제 작업이 들어왔을 때 정말 기뻤죠. 전주국제영화제는 일반적인 영화제와 다르게 아트 디렉터를 채용하는 영화제예요. 제가 작업했던 당시에는 김태헌 디자이너께서 아트 디렉팅을 맡으셨고, 저와 동료들이 아이덴티티 작업의 일부를 함께 했습니다. 그해의 메인 컨셉은 전주의 이니셜 ‘J’를 모티브로 한 나선형(Spiral) 디자인이었는데요. 포스터를 보면 알파벳 J를 회전시키면서 무한히 뻗어나가는 형태로 표현했어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 주황색 컬러 배경 버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 파란색 컬러 배경 버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 분홍색 컬러 배경 버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그 안에 쓰인 폰트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드리자면, 「OS Safe」라고 이름 지은 폰트입니다. 이 이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제가 스위스에 갔을 때 느낀 건데, 스위스 디자인은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서 어떻게 보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스위스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건 지루한 게 아니라 안전(Safe)한 거야.” 그 말이 한번에 납득되면서 영감을 받았죠.

그리고 제가 실험해 본 콘셉트 중에 하나가, 우리가 흔히 스테디셀러로 칭하는 폰트들의 특징을 가져와 블렌딩한 거예요. Arial, Helvetica, Univers, Akzidenz-Grotesk 처럼 무난한 톤을 가지고 있는 폰트들의 특징을 하나씩 가져와서,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안전한(Safe) 선택이 될 수 있는 서체를 만든 거죠.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 그래픽 콘셉트가 더 잘 드러날 수 있고, 잘 받쳐줄 수 있는 폰트가 필요했고요.



OS Safe 폰트 견본 예시 이미지

OS Safe


―“Safe”라는 테마가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의 기존 실험적인 작업들과 달리 대중성이나 보편성에 초점을 둔 작업이었겠네요.

대중에게 사랑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치지 않아요”라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어요. (웃음) 사실 평소에 저는 이런 완벽 폰트를 쓰면 왠지 그 아우라에 편승하는 느낌도 들어서 잘 안 쓰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절대 다수의 대중을 위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아트디렉터 님이) 너무 튀지 않는 방향을 원하시더라고요. 이때만큼은 그 ‘안전함’의 힘을 빌려 작업했습니다.

  •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현장 사진
  •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굿즈 노트 사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현장 사진 및 공식 굿즈 노트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Design with Zuzana Kostelanská and Line Arngaard



―지금까지 몇 가지 커스텀 프로젝트에 대해 여쭤봤는데요. 클라이언트와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 때 조율하거나 설득하는 나름의 원칙이 있으신가요?

저는 항상 클리어하게 하려고 해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은 하지 않으려 하거든요. 물론 직관적인 감각만으로 설명이 필요 없는 멋진 결과물을 만드는 디자이너 분들도 계시지만, 제 방식은 반드시 언어화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작업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클라이언트에게도 제 의도를 충분히 말로 전달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죠.

그럼에도 의견이 충돌한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디자인이 모든 상황에서 최우선 순위는 아닐 수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이야기하게 되죠. 제 디자인에 있어서 제가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하한선까지는 충분히 설득해보되, 그 선을 넘어서는 경우는 클라이언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견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올해, 혹은 장기적으로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이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올해는 특히 타입 디자인의 비중을 좀 높이고 싶어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만들어두고 출시하지 못한 폰트들이 꽤 쌓여 있는데요. 올해는 쌓아둔 폰트들을 본격적으로 출시해서 더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작업들을 이어가면서 더 많은 분들께 저희가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Glyphs 글립스 폰트 작업창 확대 이미지

―그렇다면 타입 디자이너로서, 이미지나 영상이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서 여전히 ‘텍스트’가 가진 힘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저는 ‘문자’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도구 중 가장 훌륭한 인공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자가 전달할 수 있는 가치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봐요.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텍스트 파일은 이미지 파일보다 용량은 훨씬 작은데 전달력은 훨씬 명확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면에 있어서도 이미지보다 문자가 압도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봐요. 그런 가치 있는 도구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고, 심지어 그 일을 제가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작업 영역이나 방식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지향점이 있나요?

저는 ‘변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실수를 할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을 텐데 그럴 때마다 고집부리기보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임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주변에 옳은 소리를 해주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편이에요.

―마지막으로, 필드를 떠나기 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마디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in sight of TASTE!

SPEEDY 10문 10답


Q1. 오렌지 슬라이스 타입 디렉터의 최애 과일은?
애플

Q2. 가장 좋아하는 라틴 폰트는?
Arial, Trinité (태어난 연도가 같은 폰트 2개)

Q3. 한 글자만 그려야 한다면, 어떤 글자?
대문자 이탤릭 "S"

Q4. 언젠가 그려보고 싶은 문자가 있다면?
일본어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제외.)

Q5.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색 조합은?
오렌지 & 울트라 마린

Q6. 글꼴 목록에서 가장 최근에 쓴 폰트는?
OS Attempt (미공개 폰트)

Q7. 작업실 책상에서 없으면 안 되는 아이템은?
노트, 필기구(파이롯트 만년필)

Q8. 작업할 때 무한 반복하는 노동요는?
영화 〈소셜 네트워크〉 사운드트랙

Q9. 2026년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취미는?
소셜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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