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타입(Taengtype)은 일상의 시트콤화를 지향합니다. 그 일상은 우리가 매일 보는 10포인트도 안 되는 작은 글자까지도 포함합니다. 우리 일상이, 우리 일이 크고 작은 웃음으로 흘러가면 좋겠습니다.
「놂」 탄생비화 (오프 더 레코드)
24년 여름. 한글 폰트 제작을 효율화하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폰트 제작 프로세스를 한창 연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회사에서 제가 맡은 바는 연구지만 뭔가를 효율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하기는 MBTI P 99%인 제게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참 '일 할 맛'이 안 나는 시기였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기던 '놀이'가 정신 차려보니 귀찮고 힘든 '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번 어색해진 관계를 이전으로 되돌리기 어렵듯 이미 따분한 일이 되어버린 놀이를 다시 순순히 즐기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학창시절 집중력이 좋지 않던 저의 교과서에는 늘 낙서가 가득했습니다. 따분한 수업 시간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틈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나만의 놀이를 그렇게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십년이 흘러 회사 데스크에 앉아 다시 낙서를 하고 있는 저를 만났습니다. 일 할 맛 안 나는 지루한 일과 중 다시 마주하게 된 나만의 '놂'이었습니다. 이 폰트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모눈노트를 돌려가면서까지 낙서를 하는 열정. 타인의 삶... 뭔가를 보긴 봤나보다
폰트가 숨 쉴 틈이 될 때
소위 말하는 '월급루팡'. 맞아요. 욕 먹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신기한 건 낙서하며 생긴 '숨 쉴 틈'으로 일이 다시 손에 잡혔다는 겁니다. 덕분에 주어진 미션에 따라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숨 쉴 틈'은 소금이나 MSG처럼 '일 할 맛'을 위한 조미료가 아닐까요? (변명은 아닙니다)
어쨌든 노트에 있는 이 글자들을 얼른 화면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0.5cm 간격으로 그어진 모눈종이의 점선을 잘 따라 그렸는데, 그려진 글자는 생전 보도 못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으니까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퇴근하던 버스에서 운명처럼 제 플레이리스트에서 노래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997년 발매된 산울림의 마지막 앨범의 대표곡,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알듯말듯 뭔 말인지 모르겠는, 왠지 자유분방한 느낌에 끌려 이 노래의 가사는 「놂」의 첫 샘플 문장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들로 글자를 그리면 왠지 더 마음에 드는 기분
결국 나중에는 티셔츠에 가사 전체를 통째로 넣어버렸습니다. (티셔츠 프린트 문의: POT)
막(쉽게) 만들었다고 막(대충) 만든 건 아닙니다
한글을 그리는 건 꽤 긴 시간을 요하는 일입니다. 키보드로 타이핑 가능한 한글만 만들어도 11,172자가 되니까요. 그래서 사용자들이 쓸 수 있는 폰트로 완성되기까지는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리기도 합니다. 아마 「놂」을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만들었다고 하면 많은 타입 디자이너들에게 지탄 받을 겁니다. 그나마 조합형 폰트라고 하면 조금은 설득할 수 있습니다.
조합형 폰트는 우리가 잘 아는 「안상수체」처럼 형태가 변하지 않는 자소가 반복적으로 조합되는 폰트를 말합니다.
글자를 아주 크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뼈대와 획의 형태를 변형하는 것에 제약이 있을 땐, 눈에 보일 듯 안 보일 듯한 부분을 조정해 글자의 인상을 좌우해야 합니다. 'ㅅ, ㅈ'처럼 바깥으로 뾰족한 획들을 굵기에 맞게 적절히 다듬고 'M, A'와 같이 획이 굵어지면서 뭉치는 부분을 미워보이지 않게 다듬어 주어야 누구 하나 안 삐지고 잘 놀 수 있습니다.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 외줄타기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놂이 혼자만의 놀이가 되지 않으려면, 문자로서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에서 너무 많이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든 폰트가 그렇듯 「놂」도 새로움과 익숙함, 위트와 오버센스 사이에서 적절한 정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ㅗ, ㅛ, ㅜ, ㅠ의 구조에 대한 고민의 흔적
눈과 손에 익숙한 형태를 찾아서 조금씩 비틀기
네모 반듯한 모눈종이를 그대로 따라 그리며 한글 자소의 다양한 조형을 탐구하며 새로움(이미지 속 맨 위 '월요일)을 찾기 위한 시도와 함께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형태(이미지 속 맨 아래 '월요일')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실제 외줄타기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부채나 봉을 활용하듯, 여기선 '쓰기'라는 것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쓴 글씨에 자연스레 담기는 획 순과 각도를 활용해 새로우면서 익숙한, 그 적절한 어딘가(이미지 속 가운데 '월요일')에 무게중심을 둘 수 있었습니다.
알파벳과 숫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글보다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자칫 너무 뻔할 수도, 너무 알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강한 바람이 부는 하늘에서 타는 외줄 같달까요? 조합형 한글의 특징을 반영해 라틴과 숫자도 모노스페이스로 작업했습니다. (대문자 'O'만 빼고요. 어쨌든 「놂」은 코드 작성 같은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폰트가 아니라, 나 재밌자고 만든 제목용 폰트니까요)
자존감이 아주 강한 O
풍류가 있는 곳에 「놂」을!
위의 제작기를 읽고 여기까지 내려왔다면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놂」이라는 폰트가 어떤 큰 무언가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생각하지 않고 이름처럼 정말 놀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저 풍류가 있는 곳에 쓰이면 조금 더 신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기리고』의 앱에 「놂」이 쓰였는데요. 실험적인 구조가 풍기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리즈의 전체적인 오컬트, 호러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직접 시청해보며 느껴보시길)
처음 출시한 Light, Regular, Bold 세 가지 두께로는 충분히 신나지 않은 것 같아, 책이나 영상의 타이틀로 써도 충분히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도록 ExtraBold 두께를 추가했습니다. 함께 쓰이는 디자인 요소에 따라 적절한 두께를 사용한다면 보다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신나게 즐겨 주시길!
Editor
탱타입 정태영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