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티포텍의 대표작, 「History」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18년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프롬프트 한 줄로 '딸깍' 하면 뭐든 그려지는 AI 시대죠.
참 편리하지만, 한편으론 고민의 과정이 생략된 결과물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2008년 당시, 로마 시대 비석 글자 위에 수백 년의 역사를 겹겹이 쌓아 올린 이 폰트는 디자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단순히 예쁜 폰트를 넘어, 디자이너가 직접 역사의 층(Layer)을 고르고 섞으며 '나만의 맥락'을 찾아가게 만들었거든요.
"디자인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피터 빌락의 말은, 효율성만 따지는 지금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알고리즘은 흉내 낼 수 없는 디자이너의 고집과 우직한 실험 정신, 그 뜨거웠던 제작기를 만나보세요.
글: 피터 빌락(Peter Biľak)
아티클 원문: https://www.typotheque.com/articles/the-history-of-history
기술의 물결, 그 위에 뜬 디자인
폰트 디자인은 언제나 기술의 흐름을 타고 변해왔습니다. 인쇄 기술의 물결이 바뀔 때마다 디자인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18세기, 종이와 잉크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획의 굵고 얇음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섬세한 폰트들이 태어났습니다. 19세기 말, 자모 조각기(pantographic punch)가 도입되면서 원도 하나만 있어도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졌고, 덕분에 폰트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유연한 시스템으로 진화했습니다.
20세기 중반은 어떤가요? 사진 식자 시스템 덕분에 자간과 커닝을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손글씨를 닮은 폰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보급되면서는 '모듈성'(modularity)이나 '무작위성'(random chance) 같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힘들었던 개념을 담은 새로운 폰트들이 등장했습니다.
문제 해결, 그 이상의 가치를 찾아서
하지만 폰트 디자인을 단순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로만 본다면, 디자인이 설 자리는 너무나 좁아집니다. 자칫하면 디자인이 역사적 맥락은 거세된 채, 그저 기술적 요구에 맞춰 뚝딱 만들어내는 '반응 장치'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요.
기술의 진보가 문화의 진보를 앞질러 갈 때, 우리는 종종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곤 합니다. 폰트 디자인이 지켜온 '역사적 맥락'이나 '고유의 정체성'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본질적인 가치들 말입니다.
기술적인 난제를 해결하는 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잠시 스쳐 가는 샛길에 불과합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다면, 역설적으로 폰트의 역사는 거기서 끝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장대한 역사가 있기에, 지금도 새로운 디자인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1990년대: 터스칸 폰트의 매력에 빠지다
「History」는 제가 작업했던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 긴 호흡이 필요했습니다. 이야기는 1990년대 초, 19세기 장식 폰트인 '터스칸(Tuscan)' 스타일의 매력에 푹 빠져 그 구조를 뜯어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터스칸(Tuscan) 스타일의 구조적 형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끔찍하게 여기고, 교과서들은 이때의 폰트를 '퇴폐적'이라거나 '퇴보했다'고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엔 달랐습니다. 터스칸 폰트만이 가진 기묘한 매력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당시 저는 이 폰트들을 겹쳐 쓰는(layering) 실험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혀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Decoratica by Peter Bilak, 1994
2002년: 매일 다른 얼굴을 하는 폰트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2002년, '트윈 시티(Twin Cities)' 폰트 제안 작업을 하면서 묵혀두었던 아이디어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는 세인트폴과 미니애폴리스를 위해 단 하나의 폰트를 만드는 대신, 타이포그래피가 진화해 온 과정을 보여주는 폰트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이름하여 「History」였죠.
컨셉은 이랬습니다. 사용자가 「History」 폰트를 선택하면, 컴퓨터 달력과 연동되어 매일 다른 스타일의 폰트가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은 고전적인 가라몬드(Garamond)였다가, 내일 문서를 열면 그보다 후대인 그랑존(Granjon) 스타일로 바뀌어 있는 식이죠.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자를 통해,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타이포그래피의 흐름을 마주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Design Institute Minneapolis 를 위한 제안서, 2002
21세기를 담은 21개의 투명한 층(Layer)
2004년 무렵부터 저는 글자 형태를 자유롭게 재조합하는 레이어링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욕심이 나서 스타일을 하나둘 추가하다 보니 작업은 끝도 없이 복잡해졌습니다. 모든 스타일이 서로 완벽하게 포개지려면 철저하게 동일한 비례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이러다간 영영 끝나지 않겠다 싶어 2008년, 과감하게 스타일 개수를 21개로 확정했습니다. 다소 즉흥적인 결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프로젝트가 담고 있는 '21세기의 타이포그래피 역사'를 상징하기엔 '21'이라는 숫자가 제격이라 생각했습니다.

History 스케치, 2004
로만 비석 대문자의 뼈대를 공유하는 「History」에는 21개의 레이어, 즉 21개의 독립적인 폰트가 들어있습니다. 르네상스, 바로크, 초기 그로테스크, 디지털 타입까지 아우르는 이 투명한 레이어들을 겹치면, 세상에 하나뿐인 무한한 스타일이 탄생합니다.
물론 막 섞다 보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기괴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신중하게 다룬다면 재미는 물론이고, 놀랍도록 신선하고 실용적인 폰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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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0년경 로만 비석 대문자의 가느다란 뼈대(레이어 1)에, 보도니 스타일의 강렬한 획 대비(레이어 3)를 입히고, 18세기 스타일의 아주 얇은 세리프(레이어 10)를 얹어보세요. 디도나 보도니 스타일을 그럴싸하게 흉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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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사선 축을 가진 뭉툭한 모델(레이어 2)과 넓은 펜촉의 브래킷 세리프(레이어 8)를 합쳐 1470년 니콜라 젠슨의 폰트 느낌을 낼 수도 있죠.
하지만 단순히 옛것을 흉내 내는 건 공부는 될지언정 흥미롭진 않습니다(그럴 바엔 진짜 옛날 폰트를 쓰는 게 낫죠). 훨씬 더 짜릿한 건 역사를 확장하고, 만난 적 없는 시대들을 뒤섞는 일입니다. 초기 컴퓨터 시절의 투박한 비트맵(레이어 7)과 보도니의 섬세한 세리프(레이어 10)를 결합하고, 그 위에 15세기 캘리그라피 장식(레이어 17)을 얹어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미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History」 폰트 시스템의 다양한 레이어링 가능성 예시
도구로서의 History: 발견하는 즐거움
21개의 레이어를 일일이 다루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에, 저는 'History Remixer'라는 웹 프로그램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레이어를 켜고 끄며 놀 수 있는 도구였죠. (이 프로그램은 2015년에 문을 닫고 온라인 미리보기 기능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인디자인에서 레이어를 하나하나 조절하는 건 번거롭지만, 어쩌면 그 불편함 속에 진짜 즐거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튀어나오는 낯선 조형미를 발견하는 기쁨. 이 '발견의 즐거움'이야말로 제가 긴 시간 이 프로젝트를 붙잡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History」라는 이름은 다소 건방지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타이포그래피 역사의 그 방대한 시간을 제 작업 안으로 끌어안았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감의 원천들: 소설에서 폰트까지

Milan Kundera Immortalité, 1990
이 프로젝트의 뿌리가 된 영감들을 밝혀야겠네요. 물론 폰트의 역사가 가장 큰 스승이었지만, 특별히 제 마음을 움직인 작품들이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나오는 '다중역사적(polyhistorical)' 모델이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인물을 섞어, 실제로는 만날 수 없었던 괴테와 헤밍웨이가 가상의 대화를 나누게 하는 그 문학적 상상력 말입니다.

Oswald Cooper, 1936
타이포그래피 선배들의 실험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36년 오스왈드 쿠퍼(Oswald Cooper)가 한 획에 15가지 세리프를 적용해 본 실험, 매튜 카터(Matthew Carter)가 워커 아트 센터를 위해 만든 가변 폰트 'Walker', 그리고 어도비의 페넘브라(Penumbra) 같은 실험적인 폰트들이 제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1995년, 로리 헤이콕 마켈라는 워커 아트 센터를 위해 매튜 카터에게 새로운 서체 디자인을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Walker는 여러 레이어를 조합해 사용할 수 있는 가변 서체입니다.
교육용 장난감인가, 실무용 폰트인가?
어떤 분들은 「History」가 실용적인 폰트라기보다 교육용 도구 같다고 평합니다. 물론 글자 구조를 공부하는 데도 좋겠지만, 저는 이 시스템의 '실용성'을 믿습니다. 상업적으로 쓰이길 바랐던 저의 소망대로,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가 멋지게 활용하고 있으니까요.

Best designed French books, design by Magnani & Nicolas, 2008
10년 넘게 폰트 회사를 운영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클라이언트들은 대개 뛰어난 전문가들이지만, 너무 바빠서 새로운 기능을 익힐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스타일 세트’나 '확장 언어 지원' 같은 기능을 아무리 공들여 만들어도, 대부분은 그 존재조차 모른 채 지나가 버리죠. 비싼 돈을 주고 산 폰트가, 단순히 타이핑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걸 평생 모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워드에서는 제대로 쓸 수도 없고 전문 프로그램에서조차 다루기 까다로운 이 복잡한 폰트에 15년을 쏟아부은 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요?
Abbott Miller of Pentagram 이 적용한 「History」 사용 예시
우직한 신념이 만드는 가치
「History」를 발표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저는 그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작업물 속에서 살아 숨 쉬는 「History」를 볼 때마다 저는 여전히 깊은 전율을 느낍니다.
이 프로젝트가 제게 남긴 교훈은 분명합니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계산기가 지배하는 디자인 시장에서도, '내가 진심으로 믿는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는 우직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출시 전날까지도 저는 "과연 누가 이걸 쓸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저는 결과보다 창작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충만함을 느꼈으니까요. 상업적인 압박이 거센 세상에서 이런 순진한(naive) 접근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또 다른 개인적 연구에 몰입할 용기를 줍니다.
우리의 연구가 충분히 깊고 단단하다면, 결국 야생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분명 자신의 쓰임새를 찾아낼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