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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에디터 G의 영수증: 시작하며
안녕하세요, 에디터 G입니다.
저는 '예쁜 것' 앞에서는 이성이 마비되는 자타공인 맥시멀리스트입니다. 미리 밝혀두자면, 앞으로 소개한 아이템들은 협찬도 법인카드 찬스도 아닌 제 월급을 탈탈 털어 장만한 것들인데요.
만약 폰트 회사를 묵묵히 글자만 깎는 정적인 공방으로만 생각하셨다면, 오늘 제 영수증을 보고 조금 놀라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가장 핫한 타입 파운드리(Type Foundry, 폰트를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들은 글자를 넘어 ‘문화’를 팝니다. 폰트의 인상을 대변하는 오브제를 기획하고, 저와 같은 팬들은 마치 락 밴드의 굿즈를 수집하듯 그 감각에 열광하죠. ‘만질 수 없는 글자’를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치환해 낸 파운드리들의 본업 같은 부업을 소개합니다. 영수증 아이템 #1: 폰트 회사의 로고 플레이📌 Dinamo — ABC Cap
🧾 에디터 G의 코멘트
현재 글로벌 타입 씬에서 가장 '폼'이 좋은 파운드리를 꼽으라면 단연 디나모(Dinamo)입니다. 한국의 윤민구 디자이너와 협업해 두 개의 폰트(ABC Favorit Hangul, ABC Whyte Hangul)를 선보였을 만큼 한국과도 인연이 깊죠.
이 모자는 사실 미국 뉴욕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NYC 로고 모자를 위트 있게 오마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폰트 이름 앞에 'ABC'를 붙이는 디나모만의 정체성을 로고로 만든 것이죠. 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지만, 이 핑크 컬러가 출시된 순간 결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명 로고를 비트는 테마에 충실하게 모자 안쪽에도 깨알 같은 디테일이 숨어 있습니다. 폰트의 디테일을 깎는 집요함이 굿즈의 만듦새에도 그대로 투영된 느낌이랄까요.
굿즈 라인을 전개하는 서브 브랜드, ‘디나모 하드웨어(DINAMO HARDWARE)’의 로고 역시 미국의 유명 슈퍼마켓 브랜드 ‘Whole Foods Market’ 로고의 오마주입니다.
디나모가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모자 안팎에 슬쩍 숨겨놓은 건, 어쩌면 제가 이 모자를 갖고 싶었던 이유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아요. ‘알아봐 주면 반갑고, 아니면 말고!’ 같은 느낌이죠. 남들은 몰라도 나만은 이게 요즘 제일 쿨한 파운드리 물건이라는 걸 안다는 그 뿌듯함! 이 모자의 진짜 가치는 남의 시선이 아니라, 그냥 이걸 골라낸 제 만족에 있으니까요.
✅ 디나모 굿즈에 사용된 폰트는?
영수증 아이템 #2: 폰트를 맡을 수 있다면?📌 누타입 — 페이퍼 인센스 견본집
🧾 에디터 G의 코멘트
해외에 디나모가 있다면, 국내 파운드리 중 제 소유욕을 자극하는 곳은 단연 누타입(nutype)입니다. 이름(nu:new)처럼 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이들의 행보를 런칭 때부터 지켜봐 왔는데요.
이 견본집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 생생합니다. 폰트를 보여주는 매개체로 '페이퍼 인센스'를 선택하다니요. 무형의 영감을 유형의 결과물로 만들고, 이를 다시 태워 향기(무형)로 돌려보낸다는 컨셉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서사를 갖습니다. 세 가지 폰트가 각각 독립적인 견본집이면서도 하나로 합쳐지는 모듈형 구조까지! 아까워서 차마 불은 못 붙이고 있지만 책상 위에서 폰트를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소비였습니다.
✅ 누타입 굿즈에 사용된 폰트는?
영수증 아이템 #3: 가장 과격한 글자를 위한 다정한 안내서📌 Space Type — 《Gnarled, Scratched, Scorched, and Dripping》
🧾 에디터 G의 코멘트
온갖 독립출판물을 만날 수 있는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배회하다 홀린 듯 집어 든 책입니다.
뉴욕의 디자인 스튜디오 겸 타입 파운드리, 그리고 리소 인쇄소까지 운영하고 있는 스페이스 타입(Space Type)이 발행한 진(Zine)인데요. 표지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레터링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죠.
이 책은 익스트림 메탈 레터링의 세계를 타이포그래퍼의 치밀한 시선으로 해부합니다. 메탈 밴드의 로고 특유의 기괴하고 살벌한 미학이 어디서 기원해 어떻게 대중문화로 스며들었는지 그 진화 과정을 흥미롭게 파헤칩니다. 심지어 독자가 직접 메탈 레터링을 그려볼 수 있는 연습 코너까지 마련해 두었죠. 이토록 하드코어하면서도 친절한 타이포그래피 안내서라니, 기꺼이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산돌구름에서 만나는 메탈 폰트
영수증 아이템 #4: 락 밴드로 위장한 폰트 회사
📌 Production Type — Metal Logo Short-Sleeve Unisex T-Shirt
🧾 에디터 G의 코멘트
앞서 소개한 메탈 레터링의 맥락과 절묘하게 이어지는 아이템입니다. 프랑스의 명문 파운드리 프로덕션 타입(Production Type)의 굿즈인데요. 가슴팍에 박힌 그래픽을 자세히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글자라고는 읽을 수가 없죠?
여기엔 꽤 흥미로운 비하인드가 숨어 있습니다. 메탈 밴드들이 밴드 로고를 이토록 난해하게 꼬아놓는 이유는,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만 우리 커뮤니티의 일원이다"라는 일종의 검증 수단(Gatekeeping)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로덕션 타입은 이러한 서브컬처의 은밀한 문법을 자신들의 브랜드 굿즈에 영리하게 차용한 것이죠. 이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걸을 때면 묘한 쾌감이 느껴집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락 밴드 티셔츠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프랑스 폰트 회사의 굿즈라는 사실을 저 혼자만 알고 있으니까요. 이 난해한 타이포그래피가 선사하는 비밀스러운 소속감이 바로 이 소비의 핵심입니다.
✅ 프로덕션타입의 어딘가 으스스한 폰트
영수증 아이템 #5: 기괴한 곡선이 찰랑이는 천을 만나다
📌 Studio Triple — Digestive Scarf (Silkiest Guillotine)
🧾 에디터 G의 코멘트
한때 그래픽 디자인 씬을 강타했던 기괴하고도 유려한 서체, 「Digestive」를 아시나요? 보통 폰트 스페시먼(Specimen, 견본집)이라고 하면 포스터나 소책자, 웹사이트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디자이너 Jérémy Landes는 이 폰트를 '스카프' 라는 물성으로 뽑아냈습니다.
사실 이 스카프는 제가 파운드리 굿즈에 입문하며 가장 처음 샀던 물건 중 하나라, 특별히 아껴두었다가 꺼내보았습니다. 목에 둘둘 감으면 추상적인 패턴 같지만, 스카프를 펼치는 순간 숨어있던 글자들이 비로소 정체를 드러냅니다. 폰트 특유의 꿈틀거리는 곡선이 천의 주름과 만나면서 매력이 극대화되는 영리한 기획이죠. 100장 한정으로 제작된 제품이라,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더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 「Digestive」 폰트 보러가기
오늘의 영수증, 어떠셨나요? 결국 저에게 폰트 굿즈란, 디자이너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결과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지고 소유하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 모니터 속 0과 1로 존재하던 글자들이 내 일상으로 들어올 때의 그 충족감. 여러분도 한 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다음엔 또 어떤 곳이 제 지갑을 열게 할까요? 더 흥미로운 영수증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