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락 디자이너는 대한민국 타이포그래피의 흐름을 이끌어온 30년 경력의 베테랑 서체 디자이너이자 폰트 전문 스튜디오 락폰트(Rakfont)의 대표입니다. 폰트릭스(Fontrix)를 공동 창업하고 네이버 나눔명조, 바른고딕, 윤고딕·명조시리즈, Rix폰트 등 1,000여 종 이상의 서체를 직접 디렉팅 및 제작했습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글 디자인의 구조적 미학과 실용성을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8년 전 폰트 디자인이라는 방대한 세계에 발을 디딘 이후, 윤디자인연구소를 거쳐 현재 폰트릭스의 폰트 디렉터로 자리하기까지 저는 오롯이 이 한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60여 개 업체의 기업 전용 폰트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치열한 현장에 있었습니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부터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 게임 회사, 지자체까지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났고, 제 손을 거쳐 기획되고 제작된 폰트만 해도 1,000여 종이 넘습니다.
수많은 전용 서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폰트를 '제작'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기획을 '설득'하는 과정이 훨씬 더 험난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현장에서 저에게 가장 큰 산은 항상 '설득'이었습니다. 기업마다 문화가 다르고 원하는 바도 너무나 다양해서, 초기에는 상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죠.
정립된 프로세스가 없던 시절에는 최종 결과물에 해당하는 다양한 시안을 무작정 들고 미팅을 다녔습니다. 운 좋게 단번에 마음에 드는 시안이 걸리면 기획이 빠르게 마무리되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적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했습니다. 첫 시안에서 확신을 주지 못하면 그다음부터는 계속 돌고 도는 '아이데이션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디자이너 개인의 감성을 따라 '느낌대로' 디자인한 결과물은 "왜 서체가 이렇게 나왔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설득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뼈아픈 교훈으로 남은 한 대기업과의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기존에 사용 중인 전용 서체 패밀리와 차별화될 수 있는 새로운 제목용 폰트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명확한 조형적 기준이나 논리적 프로세스를 세우지 못한 채, 직관적인 감각에 의존해 시안을 제안했습니다. 애초의 예상과 달리 디자인의 차별화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이 이어졌고, 결국 방향성을 잃은 채 새로운 시안만 계속 만들어내는 '아이데이션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돌고 돌아 무려 10차까지 시안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다시 9차 시안 중 하나로 결정되는 씁쓸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폰트를 제작하여 납품까지 완료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명확한 논리적 합의 없이 도출된 그 결과물은 결국 클라이언트의 실무에서 활발히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담당자에게 확신을 주고 더 좋은 결과물을 쥐여주지 못했다는 무거운 부채감은 저를 깊은 반성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과물이 아닌 '과정(Process)'으로 접근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늪을 거듭한 뒤에야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폰트 디자인 기획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Process)'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획의 방향성을 단계별 프로세스에 녹여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골격을 취했고, 왜 이런 자소의 형태를 띠며, 스킨(장식 효과) 처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명확한 근거를 들어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프로세스를 거치며 조형의 기준에 대해 서로가 공감했기에 결과물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클라이언트사의 담당자분들은 내부에서 여러 사람에게 서체를 공유하고 보고할 때 "설득하기가 너무나 쉬웠다"라며 저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MBC새로움체
MBC 전용 폰트(MBC새로움체) 프로젝트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성실히 따른 대표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MBC의 기존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젊고 신뢰감이 있으며 힘찬 활기를 느낄 수 있도록, 가독성이 좋은 구간에서 힘이 느껴지는 골격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젊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ㅇ' 자소를 완벽한 정원형으로 디자인하고, 'ㅅ, ㅈ, ㅊ' 등의 자소는 시각적으로 직선처럼 보이게 처리했으며, 힘차게 올라가는 이음줄기를 통해 폰트의 역동성을 표현했습니다. 스킨 효과는 전체 콘셉트와 부합하지 않아 연구 과정에서 과감히 제외했습니다. 각 단계별로 핵심 키워드를 도출하고 담당자들과 논의하며 디자인을 결정해 나가자, 서로에 대한 이해도와 확신이 높아져 프로젝트를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업 전용 폰트를 제작하며 단단하게 다듬어진 저만의 노하우와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획 프로세스가 바로 'Rak프로세스'이며, 이를 집약해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이 《고딕 폰트 디자인 워크북》이라는 책입니다. 기업 서체뿐만 아니라 일반 폰트를 만들 때도 후배 디자이너들이 돌고 도는 아이데이션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고딕 폰트 디자인 워크북》
한 끗의 차이를 만드는 디테일
Rak프로세스 중 폰트의 인상을 결정짓는 '골격'과 'ㅇ' 자소 설정의 예를 간단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골격
폰트에 있어 골격 설정은 개성 표현의 첫걸음이자 건물의 뼈대와 같습니다. 골격이 큰지 작은지에 따라 듬직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경쾌해 보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가 작업물에 어울리는 폰트를 정할 때, 단순한 장식 요소보다는 이 '골격의 뷰'에서 서체를 바라보면 훨씬 더 적합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ㅇ' 자소 디자인
폰트에서 'ㅇ'은 사람의 눈과 같아서 폰트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젊고 경쾌한 콘텐츠에 어울리는 폰트를 찾는다면 골격에 여유가 있고 'ㅇ'이 정원형(正圓形)에 가까운 폰트가 제격입니다. 반대로 신뢰감 있고 힘 있는 콘텐츠에는 꽉 찬 골격에 맞춰 'ㅇ'의 형태도 단단하게 꽉 차 있는 폰트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서체의 성격을 잘 이해하면, 폰트를 제작할 때뿐만 아니라 기존의 수많은 폰트 중에서 내 디자인에 맞는 서체를 선택할 때도 명확한 기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Rak프로세스의 결정체: Rak고딕 패밀리
이 치밀한 'Rak프로세스'를 바탕으로 한글 고딕의 본질적인 구조와 비례, 공간의 밸런스를 해체하고 분석하여 직접 구현해 낸 서체가 바로 Rak고딕 패밀리입니다.
사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작업을 시작할 때 너무 개성적이지 않으면서도 조형이 깔끔하고 정보 전달을 방해하지 않는 중립적인 기본 서체를 찾습니다. Rak고딕은 바로 그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가독성, 조형 균형, 명도 대비 등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는 기준점이 되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이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디자이너의 미세한 감성 차이를 조형의 차이로 세분화하여, 세 가지 핵심 구조를 분화시켰습니다.
- Rak고딕: 가장 중립적이고 가독성이 뛰어난 한글 고딕의 표준 구조. 어떤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대응합니다.
- Rak세운고딕: 'ㅊ', 'ㅎ' 등의 획 끝을 세운 모던한 조형미가 특징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영상 타이틀이나 브랜딩 디자인에 적합합니다.
- Rak정원고딕 (출시 예정): 'ㅇ', 'ㅎ' 자소를 기하학적인 정원 형태로 디자인했습니다. 지오메트릭하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이 돋보이는 감각적인 서체입니다.
조형 언어의 확장과 정밀한 통제력
이 세 가지 고딕 구조는 감성의 차이를 다시 한번 유기적으로 구조화하며 확장됩니다.
- Small: 자소의 골격을 축소해 모던하고 절제된 인상을 줍니다.
- Big (Expanded): 공간을 넓혀 넉넉하고 안정적인 인상을 전달합니다.
- Rounded: 획 끝을 부드럽게 마감해 친근하고 감성적인 톤앤매너를 제공합니다.
각 구조마다 10단계의 굵기(Weight Set)가 정밀하게 세팅되어 있어, 디자이너는 조형의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능과 무드에 맞춰 서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사용성이 가장 높은 '고딕'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조형을 이처럼 치밀하게 세분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골격과 자소 형태의 미세한 차이가 전체적인 맥락과 무드를 완전히 바꾸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기획한 콘텐츠의 성격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서체를 유연하게 선택해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실무 활용 가이드: 의도에 맞는 Rakfont 매칭법]
① 서체의 중심 축 선택하기
② 조형적 스타일로 디테일 조율하기
수동적인 선택을 넘어 직접 조율하다: RAK-VF 시리즈
이 시스템의 정점에는 베리어블 폰트(Rak-VF 시리즈)가 있습니다. "Rak-VF 고딕 Small–Big"의 경우 정밀한 가변 설계를 통해 약 10만 가지에 달하는 조합을 구현해 냅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정해진 서체를 고르는 것을 넘어, 디자이너 스스로가 서체의 톤을 직접 조율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무기를 쥐게 됨을 의미합니다.
베리어블 폰트는 실무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집니다.
① 브랜드 아이덴티티(BI) 작업
로고의 형태나 굵기에 맞춰 본문 서체의 톤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도록 미세 조정할 때
② 영상/모션 그래픽
영상 타이틀이 등장하며 폰트의 웨이트가 점진적으로 굵어지는 등의 다이내믹한 연출을 구현할 때
③ 반응형 웹/모바일 UI
디바이스 환경에 따라 서체의 웨이트와 폭이 자동으로 최적화되어 변경되도록 설정할 때
아직은 특정 환경에서만 주로 쓰이고 있지만, 향후 베리어블 폰트는 디자인 산업 전반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Rakfont에 다수 탑재된 베리어블 폰트가 디자이너 여러분께 훌륭한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디테일을 아는 디자이너에게 '설계의 주권'을 돌려주다
저의 최종 목표는 Rak고딕 패밀리가 시대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든 믿고 꺼내 쓸 수 있는 단단한 기준, 즉 한글 고딕의 가장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프로젝트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묻고 답했던 시간은 이제 Rakfont라는 브랜드에 모두 녹여 넣었습니다. 골격, 굵기, 자소의 형태 등 미세한 조형 요소가 만드는 작은 차이가 작업물의 전체 밀도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 끗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디자이너라면, 단순히 주어진 서체를 수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의도와 맥락에 맞게 서체의 골격과 무드를 직접 통제하고 '디렉션(Direction)'할 수 있어야 합니다. Rakfont는 바로 그 설계의 주권을 디자이너 여러분께 다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산돌구름 입점을 통해, 보이지 않는 디테일까지 집요하게 고민하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의 본질과 완성도에 더욱 깊이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