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장각의 소장, 노성일 디자이너
소장각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를 발굴해 그 가치와 매력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노성일 디자이너는 지역과 시대의 맥락을 존중하며,
현지인의 시선과 목소리를 온전히 담는 방식을 고집합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문자, 태국의 문방구, 미얀마의 달력까지,
동남아시아 곳곳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다듬어 한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 완성합니다.
책 속의 폰트 하나, 색감 하나까지도 맥락에 맞춰 치밀하게 선택하는
그의 집요하고 섬세한 디자인 방법론과 사용 폰트들을 살펴보세요.
작은 책들의 집, 소장각
―독자분들을 위해 소장각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소장각의 노성일 소장입니다. 소장각은 ‘작은 책들의 집’이란 뜻의 출판사이자 디자인 스튜디오로, ‘주변부’, ‘독창성’, ‘아름다운 형태’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책을 만들어요. ‘주변부’라고 하면 흔히 원의 바깥을 떠올리시는데, 제가 말하는 건 그 개념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친구나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걸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 사람이 가진 독창성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건져 올려서 아름다운 형태로 엮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소장각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셨나요?
‘규장각’에서 따와 ‘작은 책들의 집’이라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소장각'이라는 유행어를 의식해서 지은건 아니고요. 여기서 ‘작은 책’이란 유명하거나 주목받는 책이 아닌, 주목받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책을 말합니다. 또 이름에 한자*(小章閣)를 쓴 건,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한자 문화권의 역사와 의미가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요즘은 한국에서 한자 쓰는게 많이 없어진 것 같고, 서양의 방식을 차용한 네이밍이 트렌드죠. 저는 그와는 다른 방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小[작을 소]‧章[글 장]‧閣[집 각]
집 모양의 한자 로고와 숲과 나무를 표현한 한글 로고
―한글 자소를 세로로 쌓은 형태의 로고, 한자로 구성된 로고도 매우 감각적인데요.
로고는 제가 직접 만들었고, 한자로 구성한 로고와 한글 자소 ‘ㅅ·ㅈ·ㄱ’ 으로 만든 로고 두 가지를 함께 쓰고 있어요. 한자가 *표의문자니까, 이미지처럼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 집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閣[집 각]의 문 아래 ‘各'이 사실 두 번 들어가 있는데,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요? 책은 여러 사람이 같이 공유하고 얘기를 나눌 때 더 풍성해진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한글 로고는 책 등에 넣을 만한 작은 크기에서 보다 단순하고 선명한 로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게 되었어요.
*표의문자: 하나하나의 글자가 언어의 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나타내는 문자. 고대의 회화 문자나 상형 문자가 발달한 것으로 한자가 대표적이다.
―'발굴'과 ‘덕질’이라는 키워드도 소개글에 자주 쓰시는데, 특별히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발굴’과 ‘덕질’을 비슷한 개념으로 봅니다.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건, 대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고 계속 생각해 온 주제이거든요. 그건 그 사람의 ‘덕질’이고, 저는 그걸 찾아내는 ‘발굴’을 하는 거죠. 그 이야기들이 사소할 수도 있고, 상업적으로는 팔리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시간과 삶이 가진 가치를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보고, 오랫동안 쌓인 것들을 아름답게 포장해 소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메르 문자 기행⟫ 표지
―⟪크메르 문자 기행⟫은 대학원 논문으로 시작된 작업으로 알고 있는데요. 캄보디아 문자를 다루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 시작은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앙코르 와트를 보자는 마음으로 캄보디아로 떠난 거였는데요. 천 년 전의 고대 문자가 여전히 쓰이고 있고,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해 온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게 너무 흥미로워서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졸업 작품으로 책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졸업 전시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주에 캄보디아로 가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크메르 문자의 계보와 해부도
―국내에서는 캄보디아 문화 관련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현지에서 40여명의 전문가를 직접 만났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나요?
제일 큰 도움을 줬던 분은 텝 소비챗(Tep Sovichet)이라는 분인데, 캄보디아의 유명한 젊은 디자이너에요. 선배 세대들이 해온 작업과 유산을 잘 물려받아서 정리하고, 그걸 현대 젊은 세대들이 쓸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드는 등,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캄보디아 문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타이포그래픽 아나토미(Typographic Anatomy)’이라고 해서 글자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을 정리한 자료를 만들 때, 크메르 문자 버전은 정리된 자료가 없어서 태국 문자를 참고해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텝이 보더니 원래 크메르 문자가 먼저 있었고, 태국 문자가 거기서 파생됐기 때문에 명칭도 서로 달라야 한다고 바로잡아 주었죠.
⟪크메르 문자 기행⟫ 대학원 졸업작품 버전의 모습
―대학원 졸업작품 버전과 최종 출판 버전이 다른 점이 있다면요?
물론 연구를 더 많이 해서 내용이 많이 달라졌는데요. 원래는 이렇게 본 책과 글자 보기집의 부록 부분을 분리해 S자 모양으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마지막에 못 살려서 조금 아쉽긴 해요.
⟪미얀마 8요일력⟫ 표지
―⟪미얀마 8요일력⟫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될 만큼 만듦새와 공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요.
이 책은 아쉬울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충분히 구현한 것 같아요. (웃음) 무려 9개 업체, 12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표지에는 인쇄 대신 금박과 먹박을 찍었어요. 미얀마의 파웅도우(Phaung Daw U) 사원이라는 곳을 가면,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금박을 붙여 마치 눈사람처럼 형태가 변한 불상이 있는데요. 그 모습에서 착안해, 표지에도 숫자 08의 미얀마 숫자 표기로 눈사람 모양을 만들고 금박 모티프가 지나가는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표지 안쪽은 금색으로 실크 인쇄를 했는데요. 책이 달력에 대한 내용인 만큼 천문학을 많이 다루고 있어서 밤하늘의 별을 떠올릴 수 있는 패턴을 인쇄해 넣었습니다. 달력은 별을 보고 시간을 세는 학문이기에, 오랫동안 점성술과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또한 미얀마는 예로부터 ‘황금의 땅’이라 불려왔기에, 내지에 검정과 금별색만 사용하고 싶었어요.
금색이 돋보이는 ⟪미얀마 8요일력⟫ 내지
―이 책만의 특별한 디테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미얀마가 생소한 지역이다 보니,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을 기획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를 돕는 중요한 도판들은 본문에 붙여 넣었는데, 이는 판형 안에만 갇히는 책의 한계를 넘어 이미지를 확장해 감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층위를 제공합니다. 책 전체에 걸쳐 8종의 부착면이 있으며, 모두 수작업으로 하나씩 붙였어요.
⟪미얀마 8요일력⟫의 확장되는 도판
―⟪미얀마 8요일력⟫의 금색, ⟪크메르 문자 기행⟫의 빨간색 등 책마다 색을 감각적으로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색을 선택할 때 어떤 경험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태국은 제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했던 곳인데,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강렬한 색감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한국과 적도 지역은 태양 빛을 받는 각도가 달라 색의 선명도가 다른데요. 한국은 여름을 제외하면 빛이 눕혀서 들어오기 때문에 톤 다운된 색이 많지만, 태국은 태양이 거의 수직으로 내리쬐어 그림자가 짙고 빛과 색이 훨씬 선명합니다. 그래서 동남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쨍한 컬러감’이 연상될 것이라 생각했고, 동남아시아 관련 책에서는 이런 강한 색 대비를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국은 형광색을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택시나 각종 공산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죠. 그래서 ⟪태국 문방구⟫ 표지와 내지에 형광 초록을 사용하면 태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더 강하게 각인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태국 문방구⟫
―⟪태국 문방구⟫의 표지에는 영어, 한국어, 태국어가 함께 쓰였는데요. 서로 다른 문자가 조화를 이루도록 폰트를 고르신 기준이 궁금합니다.
이 표지를 만들 때는, 책에 나오는 태국의 문구 패키지처럼 빈티지한 인상을 주고 싶었어요. 이런 패키지들은 처음 제작 당시 컴퓨터 대신 손으로 제도하여 작업했을 것이기에, 그 분위기를 표지 디자인에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색을 깔고 면과 선만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택했고, 태국어 폰트는 각도기로 제도한 듯 투박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한글 폰트도 비슷하게 모서리가 작도된 티랩의 「CDR 제스트」를 사용했죠. 매끈하고 세련된 느낌보다는 손으로 작업한 듯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매번 다루시는 주제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그에 꼭 맞는 필자를 섭외하시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원고가 먼저 있고 제안을 받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주제를 정한 뒤 필자를 찾으시나요?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덕질을 듣고 주제를 길어올립니다. 동남아 책을 계속 내다 보니 관련 콘텐츠를 찾으려고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많이 살펴보곤 하는데요. ⟪태국 문방구⟫의 경우도 태국에 이주해 현지 문방구에 대해 꾸준히 기록하는 작가님의 SNS를 보고 제안했는데, 마침 그 당시 소장각 이름으로는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던 ⟪크메르 문자 기행⟫을 이미 알고 계셨고, 동남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해 주셔서 함께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직접 책을 쓰시기보단 다른 분들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엮거나 번역하는 책이 많아진 것 같아요. 둘 중 선호하시는 방식이 있나요?
책을 직접 쓰는 경우에는 자료를 깊이 파고들며 내용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크고,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흩어진 정보를 하나의 실로 꿰면서 메시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특히 재미있고, 그 메시지가 다음 단계의 저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반면 다른 필자와 작업하면, 제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시선과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일부러 다양한 분들을 초대해 책을 만듭니다. 같은 주제여도 다른 작가의 목소리가 모이면 소장각의 이미지를 함께 만드는 셈이고, 그렇게 이 브랜드 안에서 저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5m 길이의 zine, 『Unfolding Bangkok』
―특정 지역의 콘텐츠에는 되도록 그 지역 디자이너가 만든 폰트를 사용해 맥락을 맞추려 하신다고요.
네, 예를 들어 『Unfolding Bangkok』이라는 진(zine)을 만들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도시 이름인 태국 방콕의 공식 명칭 168자를 글자로 보여줘야 했기에 상징적으로 방콕 출신 디자이너의 폰트를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 위싯 포티왓(Wisit Potiwat)이라는 방콕 출신 태국인 디자이너가 만든 폰트 「Sukh」 를 발견했죠. 이 폰트는 라틴과 태국 문자 둘 다 완성도도 높고, 전통 기법인 납작한 펜으로 쓴 표현이 잘 살아 있어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 월리스 라인(Proyek Wallace Line)』 전시 포스터
―인도네시아 관련 프로젝트에도 인도네시아 디자이너가 만든 폰트를 다수 활용하셨는데요.
인도네시아어가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다 보니 라틴 폰트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정말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발리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Byofine」 라는 폰트를 예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요.
현재 주력하고 있는 프로젝트인 인도네시아 발리와 롬복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젝트 월리스 라인』의 성격과 잘 맞아 홍보물의 메인 폰트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우연히 본 릴스에서였습니다. 발리와 롬복 사이에서 새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튕겨 나가며, 해양 생물도 섞이지 않고, 양쪽 섬의 생태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경계가 바로 ‘월리스 라인’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태계를 완전히 가르는 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이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멤버들을 모아 실제로 발리와 롬복을 다녀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팀은 저를 포함해 총 6명으로, 해양 활동가, 번역가, 자바긴팔원숭이 행동생태연구자, 동남아시아 시각문화 연구자, 예술 교육가 등 각기 다른 전문 분야를 가진 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디자이너의 폰트를 활용한 사례로는 『Palugada』 라는 프로젝트도 있는데요. Palugada(팔루가다)는 인도네시아어로 ‘없는 게 없는 잡화점’을 뜻해요.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거리를 걷다보면 샴푸, 초코맛 가루, 믹스 커피 등 각종 제품을 긴 봉에 다량으로 줄줄이 걸어둔 잡화점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죠.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모아 걸어둘 수 있는 형태의 사진집 같은 진(zine)으로 제작했고, 표지에는 프로젝트와 딱 들어맞게 「Palugada」라는 이름의 폰트를 발견해 사용했습니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 마카사르라는 도시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의 작업이었어요. 그분도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며 SNS로 보시고 굉장히 반가워 하셨죠.
―라틴 폰트 말고도 한글 폰트도 맥락에 맞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폰트를 선정하셨더라구요. 최근 신간 ⟪시내버스 챌린지⟫에 스튜디오좋의 「K110 일방통행체」를 쓰신 것을 보고 너무 반가웠어요.
버스 모양으로 펼쳐지는 ⟪시내버스 챌린지⟫
⟪시내버스 챌린지⟫는 시내버스 덕후이자 세계시민교육 강사인 저자가 시내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만난 지역, 사회,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요. 편집하던 시기에 스튜디오좋이 텀블벅에서 「K110 일방통행체」 폰트 펀딩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저희 책의 이야기와 도로 위 글자의 맥락이 너무나 잘 맞아서 ‘이거다!’ 싶었죠.
―개인적으로 ⟪환영광림⟫이라는 책을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표지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더라고요.
⟪환영광림⟫
⟪환영광림⟫은 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하는 6인의 타이포그래피 콜렉티브 huruf가 쓴 책이에요. 말레이시아 거리의 4-5개 언어가 함께 쓰인 간판으로 본 다언어/다문화 말레이시아에 대한 내용입니다. 책의 표지는 책을 소개하는 간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표지에도 말레이어, 영어, 한국어, 중국어, 타밀어, 자위어로 총 6개 언어를 함께 적었어요.
―⟪환영광림⟫의 표지에서 한글 폰트로 「Sandoll 칠성조선소」 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데요.
이 책은 간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한글 폰트도 간판이라는 주제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Sandoll 칠성조선소」를 떠올리게 되었죠. 이 폰트도 실제 간판에서 개발된 폰트라서,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시각적으로도, 맥락적으로도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습니다. 형태만큼이나 그 폰트가 가진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고른 폰트입니다.
⟪환영광림⟫의 한·영 병기 조판
―⟪환영광림⟫에서 본문을 한·영 병기로 구성하고,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해 레이아웃을 다채롭게 풀어내신 점이 인상 깊었어요. 조판에 많은 공을 들이신 것 같은데요.
시간은 꽤 오래 걸렸지만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한·영 병기의 경우, 대체로 한글 독자는 한글만, 영문 독자는 영문만 읽는 경향이 있어 두 언어가 붙어 있으면 시선이 분산되거든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주를 본문 중간에 배치해 두 언어를 시각적으로 분리하려 했어요. 다만 공간에 제약이 있다 보니, 후반부부터는 각주를 많이 없애고 비어있는 공간으로 숨통을 좀 틔우게 했습니다.
―소장각의 책들은 유독 한·영 병기가 된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한국어판과 영어판을 따로 만들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는 한국 독자를 주 타깃으로 하면서도 해외 시장도 함께 고려하고 있는데, 해외판을 별도로 제작할 경우 소량을 디지털 출력으로 만들게 되어서 후가공이나 인쇄 기법에 제약이 생깁니다. 반면 한 권에 한국어와 영어를 병기하면 두 시장 모두를 아우를 수 있고, 독자분들도 큰 불편 없이 자신에게 편한 언어를 주로 읽게 되니 인쇄 방식의 제약 없이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죠.
간판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환영광림⟫의 챕터별 타이틀 페이지
―그래픽적으로 여러 문자를 한 지면에 배치할 때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나요?
우선 공간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언어가 쓰인 다양한 이미지를 보면서 공간감에 대한 느낌을 익히려고 노력하죠. 이 책에 주로 쓰인 폰트는 huruf에서 직접 디자인한 「kedai-kedai」 라는 폰트인데, 장평이 매우 좁고 모두 대문자로 쓰인, 간판에 쓰인 말레이어의 특징을 잡아 만든 폰트입니다. 책은 총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챕터별 타이틀 페이지는 두 지면을 꽉 채워서 전부 다르게 디자인해 마치 ‘간판’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어요. 한글 폰트인 「HG꼬딕씨」 같은 경우는 일부러 말레이어의 문법을 차용해 장평과 행간을 확 줄였는데요. 기존의 타이포그래피 원칙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있어도, 꽉꽉 들어찬 이미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러 지역의 문자를 다루신 경험이 있으신데, 그 과정에서 배우신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동남아시아 거의 대부분 지역의 다양한 언어를 작업에서 사용해봤어요.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언어 체계를 책에 구현하다보니, 조판의 공간감이 많이 다채로워졌습니다. 같은 라틴 알파벳이라도 베트남과 영어는 다른 행간을 사용하죠. 실제로 작업할 때도 차이가 생기는데요, 한 예로 이런 다국어 폰트들은 인디자인 설정을 잘못하면 글자 순서가 바뀌어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단락 설정에서 컴포저를 ‘World-Ready’ 로 바꿔야 그 언어의 원래 글자 순서대로 나와요. 그렇게 하려면 한국어 조판 설정도 바뀌어서 기준선이나 공간이 약간 틀어지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이처럼 각 언어의 느낌을 살리다보니 때로는 한국어와 영어의 조판 규칙이 어색해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색하더라도 괜찮아요. 한 가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과 방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은 뭔가 틀에 박힌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제 성격도 한 몫하는 것 같습니다.
―타이포그래피에 관련한 또 다른 책으로는 ⟪몹타입⟫을 꼽아주셨는데요.
⟪몹타입⟫
⟪몹타입⟫의 ‘몹(Mob)’은 예전 플래시몹에서 쓰이는 ‘군중’이라는 뜻으로, 태국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시민들이 피켓에 적은 글자들을 디지털 폰트로 만들어 무료로 배포해 그 글자가 다시 시위 현장에 쓰이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십여 개 폰트가 소개되고 있고, 태국 민주화 시위 당시 이 폰트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많이 사용돼 널리 회자됐어요. 이 책의 저자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방콕 아트북 페어에서였는데,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겨 출간을 제안드렸습니다. 이후 한·영 병기 버전을 제작해 태국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신분 노출 위험 때문에 활동 시 항상 가면을 착용하며, ‘프라차티파타입(PrahchathipaType)’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합니다. ‘프라차티파’은 태국어로 ‘민주주의’를 뜻하며, 여기에 ‘타입(Type)’이 결합돼 민주주의와 관련된 서체를 만들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 운동과 함께 볼 때 참 의미 있는 책입니다.
한글 본문 폰트는 한정적인 공간에서의 병기를 위해 장평이 좁고 가독성이 좋은 「박민규체」를 선택했습니다. 라틴은 서양인이 아닌 태국인이 디자인한 폰트 「Anuphan」을 사용해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 보셨을 때, 타이포그래피가 사회적 현장, 특히 시위나 저항의 현장에서 줄 수 있는 힘이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적 사안에 기여할 수 있고, 타이포그래피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올해 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디자이너가 사회적으로 저항하는 작업물을 만들고 공유하며, 책 출간이나 전시, 발표 등 다양한 형태로 목소리를 보탰죠. ⟪몹타입⟫ 역시 그런 흐름과 맞물려 나온 작업이어서, 시기와 맥락이 잘 맞았다고 느꼈습니다.
소장각의 아트북 컬렉션
―열 곳이 넘는 나라의 아트북 페어를 다니시고, 500권이 넘는 아트북을 소장하신다고요. 수많은 책들 가운데, 소장님께 간택되는 책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시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처음 보는 제작 방식을 쓴 책입니다. 배움의 측면에서, 제 다음 작업에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로 삼기 위해 구입하죠. 둘째는 컨셉과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는, 보는 순간 짜릿함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일반 책과 달리, 아트북만의 시장이나 소비자 면에서 특수성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이 만들고 소비하는 것 같으신가요?
아트북은 일반 출판과는 조금 다른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내용을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책이 품을 수 없는 형태적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죠. 콘텐츠의 고유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드러낼지에 초점을 두다 보니, 전통적인 책 형식 안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들을 아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형태도 훨씬 다양하고, 컨셉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런 이유로 아트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콘텐츠를 접하고 즐기는 방식 자체를 일반 책과는 다르게 '경험하는 매체'로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말레이시아 KL 아트북페어에 참여한 소장각
―소장각이 추구하는 방향도 아트북의 방식과 맞닿아 있나요?
저희는 책을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에 맞춰 그릇의 형태가 달라지듯, 책도 담는 내용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물 요리는 국그릇에, 탕은 넓은 냄비에, 꽃은 꽃병에 담아야 하듯 말이죠. 책은 늘 사각형의 반듯한 종이 뭉치로만 보여지는데, 그렇게 되면 콘텐츠의 개성과 매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먼저 콘텐츠에 집중해, 그에 맞는 형태를 찾아가는 방식을 지향합니다. 최종 결과물이 사각형의 종이 뭉치일지라도, 출발점이 콘텐츠에 맞춘 기획과 설계라면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른 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장각의 책 중 가장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책 중 하나는 아르누보 시그림책 ⟪멀고도 가까운 노래들⟫ 일 것 같은데요. 텀블벅에서 재펀딩 요청이 있을 정도로 큰 반응을 얻은 프로젝트였죠.
이 책의 1900년 초판 원서를 영국 헌책방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아르누보 양식의 일러스트와 세심한 타이포그래피에 반해 꼭 복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특히 본문 서체는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세 가지 폰트 중 두 가지(Golden과 Troy)가 쓰인 작품이라, 원서의 서체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구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박스를 열면 먼저 한글 번역본이 보이고, 그 안에 원서와 동일한 사이즈로 제작한 복간본이 들어 있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박스를 열자마자 ‘와우’ 하는 반응을 보여서 뿌듯했어요. 한글 번역본은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가벼운 무선제본으로 제작해, 원문과 번역을 감상용과 읽는 용도로 각각 다르게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번역본의 한글은 원문의 블랙레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글자연구소의 「평균」을 굵게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Sandoll 격동명조」 같은 순명조 스타일의 서체도 고려했지만, 「평균」이 현대적이면서도 형태 면에서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자유로운 디자인을 보여주는 Grafis Nusantara의 책
―아시아의 친구들이 한계 없이 자유롭게 시도하는 태도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요? 반대로 한국에서는 어떤 부분에서 한계를 느끼시나요?
동남아시아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책을 보면 한국의 시각이 얼마나 서양 중심적으로 갇혀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더 다양하고 확장된 시도를 할 수 있는데, 우리 스스로 한계를 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동남아시아 디자이너들은 일상 속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놀고 작업하며 그 즐거움을 그대로 창작에 녹여냅니다. 디자인 교육이 한국이나 유럽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깊게 몰입한 흔적이 결과물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손으로 제작하는 작업이 많은데, 그렇다 보니 공산품처럼 보이지 않고 그 자체로 유니크해 보입니다. 한국은 인쇄·제작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빠르고 저렴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거나 실험해볼 여지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원 안에서는 더 창의적인 표현 방법을 고민하게 되는데, 한국에서도 의도적으로 어떠한 제약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장각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개하고 전달하려고 하시나요? 타 문화권을 다루는 창작자로서 지키고 있는 원칙이 있다면?
항상 경계하는 것은 과거 서양이 보여줬던 방식입니다. 제국주의 시기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타 문화를 표현했던 사례들은, 어떤 문화에 대한 존중 없이 껍데기만 차용하거나 심지어 조롱이 섞인 태도를 보이곤 했죠. 저는 현지인들의 삶을 존중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해당 지역의 저자가 직접 쓴 책을 소개하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소통합니다. "이 책이 당신의 지역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까요?", "한국에서는 이런 부분이 염려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같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시선 차이를 좁혀가는 것이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정의 언어 예술⟫
―기후위기를 다룬 ⟪우정의 언어 예술⟫이나 ⟪프로젝트 월리스 라인⟫같은 작업을 보면, 환경 문제나 지역 생태계에 대한 관심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저희는 출판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전체 작업의 약 60%를 동남아 관련 책으로 채우고, 나머지 40%는 키워드에 맞는 더 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크게는 동남아, 디자인, 생태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매년 생태 관련 책도 한 권씩 내고 있어요.
앞으로 생태와 환경 관련 콘텐츠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더워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고, 다음 세대가 어떤 환경을 물려받을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콘텐츠를 고를 때뿐 아니라, 이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에도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모든 책에 다 적용하기는 쉽지 않지만, 최소한 생태 관련 작업만큼은 환경 부담을 줄이는 인쇄 방식을 쓰는 등, 대안적인 제작 방식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동남아의 밤' 모임 홍보 포스터와 현장 사진
―요즘 소장각이 특히 집중하고 있는 활동이 있다면요?
최근에는 ‘커뮤니티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만들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는데, 5주년을 앞두고 ‘앞으로의 5년은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책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은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고, 한 권이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독자에게 닿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죠.
반면 모임은 훨씬 속도가 빠릅니다. 이번 주에 있었던 일을 다음 주에 바로 다룰 수 있으니 파급력도 훨씬 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연결과 아이디어가 바로 생겨납니다. 책에서는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오래 남을 중요한 이야기들을 담고, 모임에서는 훨씬 다채롭고 시의성 있는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소장각은?
앞으로도 ‘출판사’라는 틀에만 머물지 않고, 기획자로서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장을 만들고,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실험하며 무궁무진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다음 디자이너 토크 예고
1인 출판사로서 또 브랜드로서,
책 너머에서 펼쳐지는 소장각의 모든 일이 궁금하시다면 9월 11일의 토크를 놓치지 마세요!
in sight of TASTE!
SPEEDY 10문 10답
Q1. 유독 좋아하는 후가공은?
박(음각과 양각… 박으로 레이어 짜기 등)
Q2.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색 조합은?
보색 대비, 그리고 쨍한 색깔
Q3. 내 사진첩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미지는?
동남아 여행중 찍은 종교적인 모티프
Q4. 최애 애니메이션과 웹툰을 추천한다면?
진격의 거인, 레사, 마법스크롤 상인 지오, 잔불의 기사
Q5. 작업할 때 무한반복 하는 노동요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K-POP (원픽: aespa-Armageddon)
Q6. 동남아 커피 vs 차 vs 디저트
디저트 (망고 스티키 라이스!)
Q7.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남아메리카
Q8. 작업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한 문장(혹은 좌우명)은?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Q9. 완전히 떠나보낸 취향은?
미니멀리즘
Q10. 나에게 자극을 주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대만의 왕쯔홍(Wang Zhihong) 디자이너